미국 기업들이 안심하는 이유
툴루이 차관보의 답은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에 반도체 공장이 없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 등 세 개 기업만 중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다만 TSMC의 중국 내 생산량은 전체 생산량의 7~8%(웨이퍼 기준)밖에 되지 않는다.이에 비해 삼성전자는 전체 낸드플래시의 4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중국 의존도는 더 높다. D램의 중국 생산 비중은 45% 내외다. 2020년 인텔로부터 다롄에 있는 낸드플래시 공장까지 인수했다. ‘모든 기업에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반도체 보조금 요건은 실상 알고 보면 대부분 한국 기업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 반도체업계는 상무부와 협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보조금 규정을 소화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에 불리할 내용은 이뿐만 아니다. 반도체법은 공급 부족을 전제로 탄생했다. 코로나19 이후 빚어진 반도체 부족 현상이 이 법의 제정 배경이다. 이 때문에 ‘예상을 뛰어넘는 이익을 얻으면 보조금의 75%까지 토해낼 수 있다’는 이익공유 조항이 들어갔다. 그런데 현재 메모리 반도체는 공급 과잉 상황이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 메모리 사업에서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지만 미국 반도체법엔 공급 과잉을 전제로 한 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한국만 피해
보조금 대상과 규제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한국과 대만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아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그런데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규제받는 건 중국 내 사업이다. TSMC는 그나마 중국에서도 파운드리 사업을 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메모리반도체 사업만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에 시스템반도체 공장을 지어 보조금을 받으면서 시스템반도체가 아닌 중국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을 통제받는 것이다.미국은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근거로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 공장 증설을 제한하기로 했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생산하는 첨단 반도체는 10년간 5%(웨이퍼 투입량 기준)까지만 늘릴 수 있게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반도체법은 한국 차별 규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반도체법의 현실적 모순을 지적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당장 중국 공장 문을 닫지 않아도 되니 최악은 면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일이 언제까지 반복될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