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잠재적 동맹국이자 잠재적 적국인 주변 강대국-중국, 일본, 러시아-을 상대해야만 합니다. 미국의 핵우산이 없어질 경우 한국은 자력 핵무장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핵무기의 엄청난 억지력을 감안하면 핵무장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겁니다.” 존 J 미어셰이머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의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한국어1판 저자 서문’에 있는 대목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에 둘러싸인 폴란드를 한국과 동일한 처지로 지목한다. 두 나라가 현대사에서 인근 국가의 식민지였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 독자‘만’을 위해 쓴 저 서문의 서명 날짜는 2004년 6월 18일이다. 충격적인 견해였지만, 한국인들은 무관심했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가 기각된 지 한 달쯤 지난 뒤였다. 우물 안 개구리들은 그때도 지금처럼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느라 바빴다. 서문을 다시 읽으니 새삼 쓴웃음이 난다. 세계적 국제 정치학자인 미어셰이머 교수는 냉혹한 국제 정치의 원리만 알았지 ‘한국 정치의 변태적 실상’은 몰랐나 보다.
미국의 핵우산 제공 보장을 위한 압박 수단인 우리 정부의 핵무장 가능 주장은 지혜롭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 일부 의원으로 하여금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게 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다. 한데, 요즘 한국 보수정치인들은 무슨 술주정처럼 핵무장을 떠들어댄다. 가끔 사석에서 한국의 핵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나는 되묻는다. “주사파 정권이 핵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찬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21세기 한국 정치의 치명적 화두’인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핵무기는 영국의 핵무기다. 미국 민주당의 핵무기는 미국의 핵무기다. 미국과 영국의 좌파는 이념 이전에 국체(國體)와 국익을 수호한다. 그러나 남한 주사파 정부의 핵무기는 국가가 아니라 정권의 핵무기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은 파키스탄보다 열등하다. 정권교체는 민주공화국의 생리(生理)인 데다 현 야권의 주류인 주사파는 언제든 정권을 되찾을 것이다. 미친놈과 바보가 싸우면 미친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그때 그들이 보수정부로부터 정권과 함께 핵탄두를 인수하면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질서는 독해(讀解)가 힘들어진다. 북핵을 막겠다고 만든 핵이 북핵보다 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이 상상에 그치건 말건 이런 상상을 해야 하는 한국이 비극이고 이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보수정치인들이 이 비극의 주연을 맡은 코미디언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국민의 더러운 것들이 추출돼 빚어진 거울이다. 좌파 국회의원은 자기들끼리 해먹으려고 모여 있고 우파 국회의원은 각자 해먹으려고 모여 있지만, 가짜 진보 가짜 보수라는 그 ‘가짜’라는 점에서 공범이다. 진보 국회의원의 키워드가 ‘사기꾼’이라면 보수 국회의원은 ‘속물’이다. 한국 보수정치인들이 바보인 까닭은 무식해서만이 아니다. 신념이 없고 목숨을 건 과제가 없어서다. 주사파는 좌파가 아니라 사교(邪敎) 환자들인데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해 자기가 주사파인지조차 모르는 ‘우호대중’으로도 존재한다. 이런 나라에서 ‘강대국 국제 정치의 비극’을 헤쳐 나갈 ‘국방외교, 경제외교’란 불가능하다.
나는 미어셰이머 교수의 저 ‘부주의한’ 서문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서구 석학(碩學)의 두뇌로는 21세기 대명천지에 주사파라는 게 있으리라곤 상상을 못한 거다. 정명석보다 수천 배 사악하고 역겨운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해설하는 자가 이 시대의 대표지식인인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짜인 역사는 없다. 주사파는 1980년대의 업보다. 업이 소멸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의 방향이 중요하다. 주사파는 조롱과 계몽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라져야 한다. 그런 신념으로, 어떤 좌파 정권이 들어선들 핵무기 보유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정상적인 자유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보수정치인의 목숨 건 과제여야 한다. 야당 대표가 옥중공천하게 되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박한 미친놈에게 역전당하는 안일한 바보가 되지 마라. 한국 정치라는 이 끔찍한 코미디는 사실 장르가 없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거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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