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본의 '벤 버냉키'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벤 버냉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과 동문수학했다. 통화경제 전문가라는 점도 닮았다."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2월11일 트위터에 이같이 썼다. 일본 정부가 차기 일본은행 총재로 우에다 가즈오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내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 후보자가 1980년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지도교수는 스탠리 피셔 전 미국 중앙은행(Fed) 부의장이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같은 시기 피셔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우에다 후보자가 세계 중앙은행 업계에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가 일본 국회의 동의를 얻어 오는 4월9일 제32대 일본은행 총재에 취임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경제학자 출신 총재가 된다.
1882년 창립한 일본은행은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총리나 재벌 총수 등 거물급 인사들이 총재를 맡았다. 2차대전 후에는 일본은행과 재무성(옛 대장성) 출신이 번갈아 총재를 맡는 전통을 이어왔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은행 출신이 8명, 재무성 출신이 5명이었다.
역대 최장수 일본은행 총재인 구로다 총재가 재무성 출신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일본은행 출신 총재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우에다 가즈오라는 깜짝 인사를 선임했다.
'일본의 벤 버냉키'는 위기의 일본 경제를 구해낼 수 있을까. 세계가 새 일본은행 총재를 주목하는 건 10년 동안 이어진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이 기로에 섰기 때문이다. 2013년 4월 취임한 구로다 총재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시작한지 10년.
2% 수준의 안정적인 물가 상승과 경제성장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일본 경제는 장기간의 금융완화 정책이 낳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일본은 물론 세계 경제계가 우에다 후보자에게 기대를 거는 건 경제학자로서의 학문적 깊이 뿐만 아니라 정책 경험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는 1998~2005년 일본은행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책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작전 수립과 실전 경험이 모두 풍부한 장수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전 전적도 상당히 우수했다. 최근 일본 미디어들은 우에다 후보자가 일본은행 심의위원일 때의 행적과 교수 시절의 기고문, 강연록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족집게' 수준으로 일본 경제의 현황과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0년 8월 하야미 미사루 당시 일본은행 총재 주도로 제로 금리 해제를 결정했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우에다 후보자는 반대표를 던졌다. 일본은행은 1990년대초 버블(거품) 경제 붕괴로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제로금리를 실시했다. 2000년 8월은 경기가 슬슬 살아나던 시기여서 '금리 인상'의 주장이 힘을 얻을 때였다.
우에다 당시 심의위원은 "물가상승률이 아직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금리를 인상하는) 리스크를 떠 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총재단이 전날 밤까지 "가능하면 해제에 찬성해주길 바란다"며 설득했지만 그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는 정책위원회 위원 9명의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한다. 2000년 8월 회의에서 일본은행은 찬성 다수로 마이너스금리를 해제한다. 우에다 심의위원은 "내 반대가 기우로 끝나길 바란다"고 발언했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경기가 급속히 식으면서 일본은행은 제로금리 해제 7개월 만인 2001년 3월 양적완화 정책의 도입을 결정했다.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한 결정은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와 만성 디플레이션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일본은행 역사상 최악의 선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양적완화 정책은 중앙은행이 민간 금융회사로부터 국채를 사들여 시장에 직접 돈을 뿌리는 정책이다. 단기금리를 올리고 내려서 통화량을 조절하는 전통적인 금융정책보다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후유증도 큰 정책으로 평가된다.
우에다 후보자는 양적완화 정책의 도입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위험성에도 주목했다. 2001년 3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그는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경기가 좋아지면 다행이지만 좋아지지 않으면 지옥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말대로 양적완화를 시작으로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완화, 마이너스 금리정책, 장단기금리조작(수익률곡선통제), 무제한 국채 매입, 주가지수펀드(ETF) 매입을 통한 주식시장 개입 등 갈수록 파격적이지만 후유증도 큰 정책을 내놔야 했다.
작년 7월 언론 기고문을 통해서는 장단기금리조작의 한계도 지적했다. 우에다 후보자는 "장단기금리조작은 (금리의) 미세조정에 맞지 않는 정책"이라며 "금리 변동폭을 조금만 확대해도 추가 확대에 대한 기대로 인해 대량의 국채 매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작년 12월20일 일본은행이 0%인 장기금리의 변동폭을 연 0.25%에서 연 0.5%로 확대한 이후 해외 헤지펀드들의 일본 국채 대량 공매도를 5개월 전에 내다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행 총재 우에노'는 어떤 정책을 펼칠까. 일본은행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은 우에노 후보자를 "급격한 변화를 싫어하고 부작용이 강한 정책에 신중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차기 총재에 내정된 이후 국회 청문회와 간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통화정책은 경기와 물가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은 적절했다"며 "당분간 금융완화 정책을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장은 급격한 변화를 주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하지만 우에다 후보자가 구로다 총재의 대규모 금융완화를 그대로 이어나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없다.
당초 일본 정부는 차기 총재로 아마미야 마사요시 일본은행 부총재와 그의 전임자인 나카소 히로시 다이와종합연구소 이사장을 저울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미야 부총재는 디플레이션하의 금융정책과 대규모 금융완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나카소 이사장은 금융완화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정책의 일부 수정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혀왔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아마미야를 선택하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할 것으로, 나카소로 결정하면 독자 노선 색채를 강화할 것’으로 해석해 왔다. 2월6일 일본 정부가 아마미야 부총재에게 차기 총재직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자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이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로 주가가 급등하고 엔화 가치가 급락하기도 했다.
기시다 내각은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우며 아베 전 총리가 주도한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과 거리를 두려하고 있다. 하지만 자민당내 입지가 약한 기시다 총리는 최대 계파인 아베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아베파는 아베노믹스를 충실히 계승하는 것이 지난해 사망한 아베 전 총리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며 대규모 금융완화의 계속을 요구하고 있다. 후보군에 없던 우에다를 일본은행 총재로 지명한 것은 기시다 총리의 색채를 강화하면서 아베파도 배려한 선택이란 평가를 받는다. 대규모 금융완화를 유지하면서도 미세하게 궤도수정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