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6시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일대. 해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할 무렵 어디선가 환한 빛이 켜졌다. 빛이 만들어낸 거대한 원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화려한 빛의 향연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용산의 '랜드마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 설치된 레오 빌라리얼(56)의 '인피니트 블룸'(Infinite Bloom·2017)이다. 2만2000여 개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이뤄진 가로 35m, 세로 24m의 거대한 설치작품이다.
아모레퍼시픽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본사 5층 야외정원에 설치됐지만, 이 작품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신사옥을 만들 때 이 층을 뻥 뚫리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신사옥을 짓기 전 '주변 지역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세웠는데, 이런 원칙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다.
인피니트 블룸은 매일 오후 6시마다 켜진다. 2시간 동안 '빛의 잔치'를 펼치다가 오후 8시가 되면 꺼진다. 화려한 빛을 통해 작가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빌라리얼은 '자연의 생명과 죽음'이라고 답한다. 그는 물의 흐름 등 자연의 움직임을 빛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브릿지를 관광명소로 만든 것도, 영국 런던 템스강의 아름다운 야경을 완성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인피니트 블룸에선 2만 여개의 LED 조명이 내뿜는 빛이 어떨 땐 작고 동그란 원을 만들며 에너지를 응축하고, 어떨 땐 부질없이 흩어지기도 한다. 자연의 생성부터 소멸까지의 과정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작품은 수년 간의 고민 끝에 탄생했다. 빌라리얼은 2017년 건물이 완공되기 훨씬 전부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풍경'을 넘어서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서울 사람들의 일상 속에 이 작품을 녹여낼지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는 그 답을 자신의 강점인 '빛'에서 찾아냈다. 그는 이 작품을 '디지털 캠프파이어'라고 부른다. 캠프파이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빛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캠프파이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게 하자는 의도다.
캠프파이어 불꽃이 시시각각 변하듯, 이 작품도 2시간 동안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실제 자연의 생명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작품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은 어디일까. 아모레퍼시픽 측은 '건물 파크 게이트 맞은편의 한강로동 주민센터 방면'을 꼽는다. 이곳에서 보면 빛의 움직임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오는 5월 용산공원이 개방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주 주말엔 '불멍' 대신 '빛멍'을 해보는 건 어떨까. 캠프파이어를 보며 잠시나마 근심 걱정을 잊고, 따뜻한 에너지를 받기를 바란다는 '빛의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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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술’은 이렇게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갑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기사를 놓치지 않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