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챗봇인 ‘챗GPT’가 등장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PC·스마트폰용 메모리반도체에 밀려 큰 관심을 못 받았던 ‘고대역 메모리(HBM)’ D램 등 고성능 반도체가 각광받고 있다. AI 서비스 확대로 D램의 데이터 처리 속도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에선 수년 내 AI에 특화된 메모리반도체를 중심으로 새 판이 짜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주문·문의 쇄도…게임체인저로
13일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HBM 관련 주문이 쇄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대폭 끌어올린 것이다.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작동하며 서버의 학습·연산 성능을 크게 향상하는 게 특징이다.그동안 HBM은 뛰어난 성능에도 불구하고 일반 D램보다 활용도가 낮았다. 생산 공정이 복잡하고 고난도 기술이 필요해 평균판매단가(ASP)가 D램의 최소 세 배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AI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챗GPT 등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영향이다. 최근 성능을 내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HBM을 적용하겠다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가 줄을 서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세계 최대 GPU 기업인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에 “최신 제품인 HBM3를 공급해달라”고 계속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버용 CPU 세계 1위 기업 인텔도 SK하이닉스의 HBM3를 장착한 제품 판매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HBM3 가격이 최고 성능 D램 대비 최대 다섯 배까지 치솟기도 했다”며 “당초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예상한 것보다 시장 성장 속도가 두 배 이상 빠르다”고 설명했다.
엎치락뒤치락…경쟁 치열
HBM 같은 고성능 메모리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간 제품 개발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HBM은 지난해부터 AI용 서버에 본격적으로 장착될 정도로 초기 단계 시장이지만 SK하이닉스, 삼성전자는 신제품 출시를 통한 고객사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HBM 시장의 주도권을 쥔 건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미국 AMD와 함께 세계 최초 HBM을 개발, 양산했다. 1세대(HBM), 2세대(HBM2), 3세대(HBM2E), 4세대(HBM3) 등의 제품을 계속 내놓으면서 60~70% 수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2021년 2월 AMD와 협력해 메모리반도체와 AI 프로세서를 하나로 결합한 ‘HBM-PIM(지능형 메모리)’ 기술을 개발했다. PIM은 데이터를 임시 저장하기만 하던 메모리반도체에 CPU 같은 칩처럼 연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HBM-PIM을 CPU, GPU에 장착하면 서버의 연산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진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2월 PIM을 적용한 제품 솔루션을 공개했다.
AI용 메모리 기술 개발이 명운 가를 것
업계에선 고부가가치 D램이 얼어붙은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구원투수 역할을 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의 인위적 감산에 소극적인 것도 AI 기술 등의 확대로 올 하반기 D램 수요가 살아날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지난달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AI 기술에 기반한 모델의 학습과 추론을 위해서는 대량 연산이 가능한 고성능 프로세스와 이를 지원하는 고성능 고용량 메모리 조합이 필수”라고 말했다.중장기적으론 HBM 등 AI 특화 D램 개발이 업계 판도를 흔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이 미세공정 개발에 열을 올리던 시대는 지났다”며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 연산 처리 능력까지 갖춘 AI 반도체 기술 개발이 업체 명운을 가를 정도로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은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