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맞은 지 벌써 1주일이 됐다. 이 정도면 작년 말 세운 ‘새해 결심’의 초반 성적표를 매기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매일 아침 출근 전 헬스장 가기, 퇴근 후 독서…. 잉크도 마르지 않은 ‘2023년 올해의 목표’는 올해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새해 결심은 원래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위로해보지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까지 감출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자극제가 필요하다.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품고 살다가 마침내 실현한 사람들을 보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테니까. 노(老)배우 이순재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87세였던 작년 말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을 이뤘다. 안톤 체호프(사진)의 희곡 ‘갈매기’를 직접 연출하는 것이었다. 지난달 21일 서울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다음달 5일까지 상연된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를 시작한 그가 상업 연극을 연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갈매기’는 체호프에게도 꿈 같은 작품이었다. 지금은 ‘러시아의 대문호가 쓴 4대 희곡’이 됐지만, 1896년 초연 당시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체호프는 극작가의 꿈을 버리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주의 연기이론을 확립한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2년 뒤 재상연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갈매기’는 이전까지 잡지에 짧은 소설과 수필을 실으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체호프를 유명 극작가로 만들었다.
희곡은 ‘열망하는, 그러나 좌절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극작가를 꿈꾸는 청년 트레플료프는 배우 지망생인 연인 니나와 함께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극은 철저하게 실패한다. 마치 ‘갈매기’ 첫 상연처럼. 트레플료프의 어머니이자 당대 최고 여배우인 아르카지나조차 작품을 모욕한다. 게다가 니나는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유명 소설가 트리고린과 사랑에 빠진다. 시간이 지난 뒤 트리고린은 니나에게 싫증 나 떠나버리고, 트레플료프는 재회한 니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또 거절당하자 자살한다.
작가의 꿈,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고 싶은 소망…. 등장인물 각자의 꿈은 줄곧 엇갈리고 어그러진다. 이 좌절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바라는 바를 부각시킨다. 작품 속 박제된 갈매기가 창공을 가르는 날갯짓을 상상하게 하듯이.
트레플료프의 외삼촌 소린은 죽음을 앞두고 한탄한다. “코스챠(트레플료프)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네. 제목은 ‘무엇인가 하고 싶었던 인간’, 그러니까 ‘L’homme, qui a voulu’라고 하면 될 거 같네. 언젠가 젊었을 때 나는 문사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소. 멋지게 말하고 싶었지만 혐오스럽게 말했지. (생략) 몇 가지만 생각해도 땀이 날 지경이오. 결혼하고 싶었는데 결혼하지 못했어. 언제나 도시에 살고 싶었는데, 여기 시골에서 생을 마치고 있으니, 그것 참.”
이 대사, 그리고 ‘갈매기’는 체호프가 건네는 서늘한 경고다. 원하는 바를 향해 힘껏 달려가보지 않으면,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는. 새해 목표가 흐릿해지는 지금쯤 필요한 응원이기도 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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