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떼려다 혹만 잔뜩 붙였습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을 업체에 떠넘긴 것 아닌가요.”
부산 강서구 미음산업단지 내 40여 개 풍력발전기용 부품 업체들은 생짜배기로 2000만원의 컨설팅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 지난해 8월 정부에 산단 내 입지 규제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는데 지자체가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하다”며 컨설팅 자료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요구한 탓이다.
이들 풍력발전기 부품업체들은 지름 8m, 무게가 최대 40t에 이르는 철강 부품을 만들고도 공장에서 포장하지 못한다. 약 8㎞ 떨어진 녹산산단으로 이동해 포장·배송하고 있다. 30년 전 만들어진 산업분류표에 따라 화물 포장업체를 입주하지 못하도록 한 산단 입지 규제 때문이다.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는 비합리적 규제라고 여겨 완화를 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적잖은 부담만 떠안게 됐다. 낡은 입지 규제가 풀릴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몰려 있는 산업단지 규제는 정부의 ‘개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산단에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 모든 업종이 입주할 수 있도록 하는 ‘네거티브존’을 주창하고 있지만 대부분 지방 산단에선 여전히 업종의 벽에 막혀 중소기업의 입주가 녹록지 않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여러 차례 입지 규제 개선을 촉구했지만 요지부동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규제 개선의 진행이 지지부진한 탓이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따르면 지자체 등록 규제 건수는 중앙부처의 약 3배였고, 지자체 공무원 1인당 등록 규제 건수는 중앙부처의 약 7배에 달했다.
규제 개악(改惡)의 피해는 오롯이 중소기업으로 향한다. 지난해 ‘2000만불 수출탑’을 받은 대구 성서산단에 있는 한 식품제조업체는 지자체와 정부의 입지 규제 때문에 2억달러(약 2500억원) 규모 해외 일감을 최근 포기했다. 이 회사는 ‘K푸드’ 효과로 해외 주문이 폭증하면서 다섯 차례나 인근 부지에 공장 증설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구시와 산단,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경제자유구역청 등 4~5개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복잡한 행정 절차로 용지 매입 타이밍을 놓쳤다. “첨단 업종이 아니다”는 이유로 잇따라 용지 매입에 실패한 이 회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규제개혁위원회, 지자체에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돌아온 건 “귀찮게 하지 말라”는 담당 공무원의 핀잔뿐이었다.
수도권 입지 규제도 여전하다. 산업부는 ‘산업 집적 활성화에 관한 법’ 시행령 등을 개정해 폐수 배출이 없는 공장이 수도권 자연보전권역에서 신·증설할 수 있는 면적을 1000㎡에서 2000㎡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산업부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초 법제처에 규제 개선 방안을 설명했는데 아직 심사 중”이라고 해명했다.
제조업의 필수인 ‘산업용 가스’ 역시 오랜기간 입지 규제에 막혔다. 이상주 대구경북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정부가 매번 입주를 약속했지만 지켜지는 게 없다"고 지적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대통령의 강한 지시도 막강한 관료 조직을 타고 내려오면서 흐지부지되고 있다"며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할 공무원 조직이 개혁의 주체가 되면서 충분히 예고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 중소기업단체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복합 위기를 해쳐나가기 위해선 발빠른 규제 개혁이 생명”이라며 “현장에선 공무원들의 잦은 인사변경에 따른 늑장 대응, 복지부동, 보신주의, 타부처 떠넘기기 등의 행태가 여전해 기업들이 애로를 호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공무원의 적극 행정을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면책 및 인센티브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대규/최형창/강경주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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