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다. 집 좀 꾸민다는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사진에서 열외 없이 확인할 수 있는 조명. 바로 ‘스노우맨(SNOWMAN)’이다. 스노우맨은 이름 그대로 눈사람을 닮은 스탠드다. 타원형 모양의 유리 공 두 개가 포개져 있는 모양이 정감 있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스탠드를 만든 건 해외의 유명 디자인 브랜드가 아니다. 60년 된 전구회사 한국의 일광전구다.
‘힙한’ 조명회사 일광전구의 시작은 1962년 대구 내당동의 허름한 창고였다. 당시 이름은 ‘일광전구공업사’. 창업은 우연에 가까웠다. 현재 회사를 이끌고 있는 김홍도 대표의 부모는 1960년께 평화전구의 대리점을 했다. 그러다 평화전구가 부도를 맞았다. 본사 사장은 선불로 물건값을 잔뜩 받아놓고는 물건을 내주지 못했다. 사장은 김 대표의 부모에게 희한한 제안을 했다. 전구 만드는 기계를 현물로 줄 테니 앞으로 전구를 생산하면 자기에게 달라는 것. 대리점과 본사의 역할을 바꾼 셈이다.
60년간 회사는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겼다. 1970년대 산업화가 속도를 내고 전력이 안정되면서 형광등의 시대가 열렸다. 일광전구는 내수에서 수출 중심으로 전환해 위기를 피해 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한 달에 백열전구 100만 개를 생산했는데 80%를 수출했다. 1990년대에는 값싼 중국산의 공습으로 국내 전구회사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외환위기까지 맞았다. 이때 대구 시내버스 업체를 운영하던 김 대표가 회사 경영에 투입됐다.
김 대표는 당시에도 사양산업이던 백열전구를 제조하는 일에 뛰어든 이유를 최근 출간된 <일광전구: 빛을 만들다>(북저널리즘)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테이블마다 초가 있어요. 효율만 따지면 촛불은 진작에 사라졌어야죠. 백열전구가 촛불에 가장 가까운 빛이라고 생각했어요. 1879년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만든 원리가 모닥불에서 나왔습니다. 장작의 탄소를 태워 빛을 내는 걸 산업화한 거예요. 탄화시킨 대나무로 필라멘트를 만들고, 필라멘트를 전기로 가열해 빛을 만들었어요. 100년 넘게 이어진 제품이니 제가 하기에 따라서 영원할 수 있는 업종이라고 생각했죠.” 김 대표는 핵심 공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외주화하고 시장의 흐름에 따라 전구를 더 작고 얇게 제작하는 방식으로 회사의 수명을 연장해왔다.
하지만 그런 일광전구에 ‘사망선고’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07년 G8 정상회의에서 에너지 효율이 낮은 백열전구를 2012년까지 퇴출하자는 권고가 결의된 것. 2008년 한국 정부는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과 수입을 2014년부터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발광다이오드(LED)가 속속 백열전구 자리를 대체했다. 다행히도 산업용과 장식용 전구는 금지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광전구는 B2B(기업 간 거래) 회사에서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기업으로의 변화를 시작했다. 디자인스튜디오 064의 권순만 대표도 디자인팀장으로 영입했다. 전구 포장 상자부터 사무실 인테리어까지 180도 바꿔 새로운 회사로 태어났다. 그렇게 ‘빛을 가장 잘 아는 회사가 만드는 조명기구’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양초를 닮은 ‘캔들(CANDLE)’, 눈사람을 닮은 ‘스노우맨’과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스노우볼(SNOWBALL)’ 등이다. 제품 사진을 상업 스튜디오가 아닌 일반 집을 빌려 찍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따스한 느낌을 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유명 브랜드들은 점차 일광전구의 매력을 알아봤다. 일광전구는 2018년 아우디 신차 발표회 메인 콜라보(협업) 회사로 이름을 올리고 전시장에 1000개가 넘는 백열전구를 밝혔다. 도자기 브랜드 오덴세와 협업해 백조의 날개처럼 우아한 세라믹 소재의 갓이 겹겹이 쌓인 테이블 조명 ‘스완(SWAN)’도 내놨다. 최근에는 교보문고와 함께 독서등 ‘퐁듀’를 선보였다. 일광전구는 2월 서울리빙페어에 참여해 새로운 디자인의 조명 20종을 공개할 예정이다. 내년 하반기 서울 사대문 안에 전용 매장도 꾸미기로 했다.
일광전구는 지난 10월 14일 백열전구 생산 종료식을 하고 조명회사로 본격적으로 도약하겠다고 선언했다. 1962년부터 이날까지 일광전구가 생산한 전구는 총 6억2403만7840개. 앞으로는 주문자위탁생산(OEM) 방식으로 백열전구를 판매한다.
조명기구 회사로 변신해도 일광전구의 정체성은 여전히 ‘광원’에 있다. 김 대표는 백열전구의 매력을 ‘모닥불에 가장 가까운 빛’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MT를 가면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캠프파이어를 하죠. 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게 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모닥불을 산업적으로 잘 형성한 게 백열전구고요. 이건 인류 역사와 함께 가는 겁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