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나라만큼 위기설이 많이 나온 국가도 없다.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언론에 게재된 ‘위기설’이란 단어를 토대로 산출한 어조 지수를 보면 우리나라가 그 어느 국가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 중 실제 위기로 악화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뿐이다.
이는 두 가지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기설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인포데믹이었거나, 위기설에 잘 대처해 실제 위기로 전염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경우 후자보다 전자가 대부분이다.
위기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위기설과 위기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 있다. 통계기법상 가설 검증에서 위기설인 노이즈 곡선과 실제 위기 지표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실제 위기를 진단하고 위기설을 잠재워야 할 ‘최후 버팀목’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세계 보편적인 요인과 한국 특유의 요인으로 나눠 살펴본다.
첫째, 각국 최고 통치권자의 신뢰가 무너진 지 오래됐다. 코로나 이후 경제는 효율성에 따른 자원 배분 원칙이 더 강해져 ‘K’자형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 반면 ‘1인=1표’ 민주주의 체제와의 불일치로 통치권자가 하위층을 지향하면서 포퓰리즘적인 성향이 짙어졌다.
둘째, 각국 중앙은행의 실패다. 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은 커졌지만 ‘1선 목표’인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한 기본 전제인 진단과 예측에 실패해 인플레를 키웠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대표적인 예다.
셋째,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 안정의 책임을 맡은 국제기구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다. 구제금융 신청이 폭주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자체 채권 발행을 검토할 만큼 재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등 중심국의 보호주의로 세계무역기구(WTO) 기능이 무력화되고 있다. 다른 국제기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넷째,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경제가 종전의 이론과 규범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뉴노멀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로 인해 위기설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잣대의 신뢰와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다.
다섯째, 선진국과 경제 대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트러스발(發) 위기설’, 엔화 가치 추락으로 인한 일본 위기설, 부동산 디폴트에 따른 중국 위기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따라 선진국보다 해결이 더 시급한 신흥국 위기설이 뒷전으로 밀리며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여섯째, 미·중 간 패권 다툼이 점입가경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양국 간 마찰은 정치, 군사, 경제 등 모든 분야로 확산하는 추세다. 상품, 기술, 자금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동까지 제한하려는 움직임에 따라 세계 교역과 경기를 더 침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곱째, 위기설과 위기 간 방호벽인 정직성, 투명성, 책임 의식이 악화하면서 도덕적 해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사례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경우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가 오랫동안 처리되지 않는 가운데 잊을 만하면 터지는 상장사의 금융사고, 코인 등 불법 거래 자금 등을 들 수 있다.
여덟째, 우리 국민 스스로 우리 경제에 대해 냉소적으로 보는 요인도 크다. 유엔이 발표한 ‘2022 세계 행복 보고서’를 보면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 146개 국가 중 59위였으나 공포와 불안의 민감도를 나타내는 디스토피아 지수는 101위로 훨씬 낮게 나왔다. 예기치 못한 사건만 터지면 곧바로 위기설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합리적 인간’을 가정한 주류 경제학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하는 추세다. ‘합리적인 인간’이란 가정이 무너진 여건에서 자원 배분을 시장에 맡겨두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상황은 국가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위기설이 위기로 악화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최고 통치권자, 중앙은행 등 최후의 보루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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