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서울 둔촌주공 재건축 사업장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1호 회생’ 사업장으로 정한 것은 이대로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도록 방치했다간 시장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부동산 PF 부실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걸 막기 위해 전국 5000여 개 사업장별로 사업성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부동산 PF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선 분양가상한제 등 각종 규제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마중물 역할 톡톡히 한 채안펀드
금융권과 건설업계에 따르면 둔촌주공 시공사업단(현대건설 HDC현대산업개발 대우건설 롯데건설)이 27일 발행한 7000억원 규모의 둔촌주공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가 전액 차환에 성공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채권시장안정펀드와 함께 은행들이 십시일반으로 물량을 인수했다”고 밝혔다.한국투자증권 등 주관사들은 지난 21일 기존 사업비 7000억원에 1250억원을 더해 8250억원의 ABSTB 발행 주선을 시도했지만 투자자를 구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따라 시공단이 각각 1645억~1960억원의 자체 자금으로 7000억원을 떠안을 처지에 놓였다. 시장은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5930가구를 철거하고 1만2032가구를 새로 지어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사업’으로 불리는 둔촌주공 사업장은 일반분양 물량이 4700가구에 달해 수익성이 보장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원도 레고랜드발(發) 자금 경색 사태가 서울의 초우량 사업장까지 무너뜨린다면 다른 사업장들의 ‘돈맥경화’ 현상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채안펀드와 은행이 구원투수로 나서면서 시장 불안을 다소 진정시킬 수 있었다는 평가다. 채안펀드는 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뿐 아니라 회사채(AA- 이상), 기업어음(CP)·전자단기사채(A1 이상), 여신전문금융회사채(A+ 이상) 등에도 투자할 수 있다. 한 금융사 임원은 “현재 채권 금리 수준이 충분히 매력적인데도 자금시장이 얼어붙은 것은 투자 안전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이라며 “채안펀드가 선제적으로 매입해 투자심리를 살리는 역할을 적극 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캐피털 콜(자금 납입 요청)을 통한 채안펀드 추가 조성 채비에도 나섰다. 현재 채안펀드 잔액이 1조6000억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앞서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83개 금융회사에 대한 추가 캐피털 콜을 다음달 초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자금 여유가 있는 국민 신한 하나 농협 등 시중은행들은 다음달 4일 5000억원을 시작으로 다음달 중순 1조원, 12월 초 1조5000억원 등 약 3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5대 금융지주도 이날 금융위가 연 시장안정 점검회의에서 “은행채 발행을 축소하고 환매조건부채권(RP) 매수를 통해 증권사에 자금을 지원하고 머니마켓펀드(MMF) 운용 규모 확대를 검토하는 등 금융시장 안전판 역할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금융당국, PF 사업장별 집중 점검
금융당국은 조기 지원을 통한 부동산 PF 회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사업장별 집중 점검에도 들어갔다. 사업장별 자금 현황 등을 살펴보면서 부실이 터질 우려가 있는 사업장을 구분해 대처 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금융당국과 국토교통부 등 부동산 관련 부처 간 긴밀한 공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PF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선 막힌 자금줄을 뚫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분양 우려를 불식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정부가 이날 ‘15억원 초과 주택담보대출’ 허용 등의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다주택자 규제 완화 등 주택 수요를 회복시킬 추가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