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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동생·고모 아들과 결혼…'막장 근친혼' 결말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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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의 이름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이자 훗날 유럽 최강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후가 되는 ‘공주님’입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귀여운 외모에 황족이라는 신분까지, 완전히 순정만화 주인공이죠.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미녀 공주’의 삶은 얼마나 화려하고 행복했을까요.

바로크 미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가 그린 이 작품이 지금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을 떠나 한국에 와 있습니다. 오는 25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합스부르크 왕가 600년-매혹의 걸작들’에서 관객과 만나기 위해 한창 몸단장을 하는 중이죠. 정말 아름다운 모습, 멋진 그림입니다.

하지만 기사 제목을 보고 예상하셨듯이, 사실 이들 왕족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테레사 공주도 예외는 아니었죠.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족들과 테레사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결혼으로 만든 ‘유럽 최강’, 그 비극적 결말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한 번쯤 공주·왕자가 되기를 꿈꿔봅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우리 부모님은 왕족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죠.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는 오래전 왕정이 폐지됐다는 사실도 배웁니다. 그렇다고 이런 꿈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현대판 왕족 격인)‘재벌 2세’들이 나오는 드라마, (왕보다 강력한 주인공이 나오는)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만화가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특권 계층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자극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중세~근세 유럽 왕족의 삶은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 평민이나 노예보다는 평균적으로 훨씬 사정이 나았지만, 적어도 현대인인 우리들이 부러워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죠. 가장 큰 이유는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발전입니다. 기술의 발달 덕분에 당시 왕족보다 지금 서민들이 훨씬 더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플 때 훌륭한 처치를 받고, 냉난방이 잘 되는 위생적인 곳에서 살고, 다양한 오락거리를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왕족이라서 견뎌야 하는 괴로움도 많았습니다. 전쟁에서 지거나 혁명이라도 일어나면 본인과 가족의 목숨이 한꺼번에 날아갔죠. 암살당하거나 권력 암투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맞기도 했고요. 운 좋게 이런 일을 겪지 않는다 해도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왕족은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이죠. 상대방의 외모나 인품, 나이, 얼마나 먼 곳에 사는지 따위는 상관없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왕족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생존을 위한 ‘결혼용 도구’ 취급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런 정략결혼의 ‘끝판왕’입니다. 합스부르크는 13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흔한 약소 귀족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루돌프 1세가 운 좋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걸 계기로 본격적으로 몸집을 키우기 시작하죠.


가문을 키우는 주요 수단은 결혼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을 다른 나라 왕족들과 결혼시켜서, 유럽 각국 왕가에 합스부르크의 피를 계속 섞은 거죠. 주도면밀한 ‘결혼 전략’과 끈기, 여러 행운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침내 유럽의 절반을 손에 넣습니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유명한 시구도 여기서 나왔죠.

하지만 이런 전략은 훗날 비극적인 결말을 낳습니다. 정략결혼을 하려면 양쪽 가문의 ‘급’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럽 왕족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되고 나니, 급이 맞는 상대 대부분은 친척인 경우가 많았죠. 영토와 재산을 다른 가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친척끼리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 지금 기준에서 보면 ‘막장 결혼’이 반복됩니다.


근친혼이 반복되고 나쁜 유전자가 누적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들은 심각한 유전병에 시달렸습니다. 대표적인 게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이라고도 불리는 주걱턱입니다. 처음에는 외모 문제에 불과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카를로스 2세(1665~1700)에 이르러서는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발음이 줄줄 새는 수준에 이르렀죠.

불임과 위장장애, 정신이상 등 심각한 증상들도 함께 따라왔죠. 유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습니다. 당시 유럽 어린이 다섯 명 중 한 명(20%)이 10세가 되기 전에 병이나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환경에서 자라난 합스부르크 가문 어린이들은 두 명 중 한 명(50%)이 열 살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천사 같은 공주님의 슬픈 운명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도 이런 ‘유전자의 저주’를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어머니인 마리아나는 29살 차이가 나는 삼촌 겸 오촌 관계였습니다. 현대 기준에서 너무 말도 안 돼서 무슨 관곈지 이해가 잘 안되죠. 여동생의 딸이랑 결혼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총 6명인데 테레사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납니다. 1651년 태어난 테레사는 다행히 유전병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커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외모가 드러납니다.

테레사가 12살이던 1663년 그녀의 약혼 상대가 결정됩니다. 외삼촌(어머니 마리아나의 남동생)이자 고종사촌(고모인 마리아 안나의 아들)인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였습니다. 3년 후인 15살 때는 친정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의 궁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외삼촌과 조카라는 관계, 11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결혼 뒤에도 테레사가 남편을 ‘삼촌’이라고 부르긴 했지만요.


이런 행복도 길지 않았습니다. 테레사가 불과 21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죠. 유전병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6년에 불과한 결혼 생활 동안 아이를 4명이나 낳았지만, 이 중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건 장녀 마리아 안토니아 뿐이었습니다.

후손 복도 없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2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그녀가 두 번의 사산 끝에 낳은 유일한 아들(테레사의 손자)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은 6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합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당시에는 독살당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테레사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힘세고 돈 많아도 인생은 힘들어
왕족들의 삶을 보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사는 건 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대단해도 예외는 없었죠. 어느 영화에 나오는 명언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힘이 클수록 그 책임은 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일 때가 많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초나라 위왕과 장자의 일화를 볼까요. 초나라 왕은 장자가 훌륭한 인재라는 말을 듣고 금은보화를 보내면서 재상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장자는 웃으며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높은 벼슬을 해봤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소와 같은 꼴이 될 뿐이다. 몇 년간 잘 먹고 편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겠지.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할 기회가 많죠. 하지만 여러 사례에서 보듯,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배우 류승수의 말이 떠오르는 걸 보니 저도 아직 멀었네요.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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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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