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베르네 소비뇽은 신이 만들었지만, 피노 누아는 악마가 만들었다.”
와인 메이커 안드레 첼리체프는 미국 나파 밸리 와인을 세계적 고급 와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가 피노 누아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첼리체프의 별명은 ‘마에스트로.’ 그 칭호처럼 로버트 몬다비, 마이크 그르기치, 워런 위니아스키 등 미국에서 손꼽히는 거장 와인 생산자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첼리체프는 “내가 만든 위대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발가락까지 써야 셀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피노 누아 와인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도 너무 많다”고 했다.
피노 누아의 원산지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이다. 프랑스어로 피노 누아는 ‘검은 솔방울’을 뜻한다. 작고 단단한 포도송이에 흙빛에 가까운 포도알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모양이 솔방울 같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부르고뉴에서는 1세기부터 피노 누아와 비슷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가장 오랜 와인의 역사다.
수 세기를 견뎌온 피노 누아는 가장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으로 악명이 높다.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빽빽해 병충해에 취약하다. 기후에 민감해 조금만 더워지면 포도가 쪼그라들고 일찍 여물어버린다.
토양, 지형, 배수, 바람, 태양 등 포도가 자라는 데 영향을 주는 자연적인 요소 테루아에 극히 예민하다.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매우 적은 이유다.
게다가 손도 많이 가 생산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향과 풍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까칠하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악마의 품종’ 피노 누아는 잘 만들어진 와인이 되면 정반대의 매력이 폭발한다.
까만 포도알의 강렬함은 온데간데없이 와인잔 바닥이 보일 만큼 옅고 투명한 루비 빛깔이 나타난다. 와인의 떫은맛을 내는 타닌이 적어 부드럽고 신선한 풍미가 돋보인다. 묵직한 맛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엔 밋밋하다고까지 느낄 만한 맛이다.
결국엔 이들까지 매료시키는 피노 누아의 매력은 섬세하고 우아한 향이다. 갓 양조된 피노 누아에서는 체리와 산딸기, 제비꽃, 장미 같은 상큼한 향이 난다. 훌륭한 피노 누아를 처음 마시면 꽃이 가득한 정원에 서 있는 듯한 경험을 했다는 ‘간증’이 잇따르는 이유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들이 꼽는 피노 누아의 진정한 마력(魔力)은 그 유일무이함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길러냈는지, 어떻게 양조해 병에 넣었는지에 따라 피노 누아의 섬세한 향과 빛깔, 풍미는 각양각색이 된다. 그러니, 꼭 비싸고 귀하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과 이 순간 피노 누아를 함께 음미할 수 있다면…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