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19일 15:3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레고랜드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회사채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미국의 기준 금리 인상 여파로 가뜩이나 경색된 채권 시장의 투자심리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평가다. 증권가는 당분간 채권 등급 간 양극화가 심화하고 회사채 스프레드의 간극도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19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 17일 JB금융지주가 1000억원 규모의 공모채 수요예측에 나섰지만, 주문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만기 2년물에 800억 원, 3년물에 200억 원의 자금 모집을 계획했으나 2년물 230억 원, 3년물 150억 원 등 총 380억원의 수요만 확보했다. JB금융지주는 2년물을 850억 원으로 증액하고, 3년물은 수요대로 발행하기로 했다.
같은 날 300억원 규모의 공모채 수요예측을 실시한 한진도 대량 미매각 사태를 맞았다. 지난 1월과 6월 두 차례의 공모채 발행에서 모집금액 이상의 주문을 받으며 증액 발행에 성공했지만 시장 상황이 급변하면서 수요를 모으는 데 실패했다.
우량 등급의 회사채도 미달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신용등급이 AA-인 SK리츠 회사채는 960억원 모집에 910억원의 주문만 들어왔고 메리츠금융지주도 최근 진행한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모집액 3000억원을 채우지 못했다. SK렌터카는 800억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희망 금리 밴드 상단을 70bp까지 열어뒀지만, 주문을 다 채우지 못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등 인기 콘텐츠를 제작한 콘텐트리중앙은 250억원을 모집했으나 80억원의 주문을 받는 데 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다 일정을 전면 재검토하는 회사들도 나오고 있다. 자동차 공조장치 전문기업 한온시스템은 지난 달 25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했으나 금리가 급등하면서 조달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시장에서는 일정을 내년으로 연기하거나 기업어음(CP) 등 금리 부담이 적은 조달 방법으로 선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사업 계열사인 SK루브리컨츠는 공모채 시장이 어려워지자 설립 이후 처음으로 3000억원 규모의 장기CP를 발행하기도 했다.
문제는 기업어음(CP) 등 단기 자금 조달 시장 사정도 녹록지 않다는 데 있다. CP 91일 물은 지난 7월 2.58%로 2%대를 유지했으나 지난 18일 금리가 3.76% 대로 최근 10년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회사채 시장에 그나마 온기를 불어넣던 리테일 수요는 고금리의 우량 한전채에만 몰리고 있다. 신용등급 'AAA'급의 한국전력공사는 이달 4번에 걸쳐 1조4000억 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다. 한전채 채권금리가 5% 후반대에 육박하면서 투자 메리트가 부각된 덕분이다.
그러나 최근 예금금리가 5%대에 올라서면서 리테일 수요도 사그라들었다. 한 증권사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리테일로 시장 분위기를 바꾸기엔 역부족인데다 수요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라며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과 레고랜드 사태 등 악재가 겹치면서 채권 시장은 앞날이 더욱 어두워졌다"고 전했다.
업계는 당분간 채권 등급 간 양극화가 심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연말까지 금리 인상 기조가 이어질 경우 기관 투자가들의 조기 '북 클로징' 가능성도 제기된다. 회사채 스프레드 간극도 커지고 있다. 지난 18일 국고채 3년물 금리와 회사채 3년물(AA- 등급) 금리는 각각 4.24%, 5.40%로 신용 스프레드는 1.16%P로 벌어졌다. 신용 스프레드가 커졌다는 것은 회사채와 같은 크레디트물에 대한 투자심리가 위축됐다는 의미다.
일각에서는 레고랜드 사태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유동화물뿐만 아니라 채권 시장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최고 신용도를 인정받았던 지방자치단체 ABCP가 디폴트를 맞자 이를 계기로 기관 투자가들이 시장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PF 유동화물은 증권사와 건설사의 매입 확약 규모가 커서 건설 산업의 불안으로도 번지고 있다.
한편 레고랜드 사태를 촉발한 강원도는 시행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가 8월에 대출채권자인 아이원제일차와 내년 1월까지 대출 기한 연장에 합의하고 4개월의 선취 이자까지 납부했다고 밝혔다. 앞서 강원중도 개발공사는 레고랜드 코리아 사업 관련 자금 조달을 위해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를 설립하고 2050억 원 규모의 ABCP를 발행했다.
그러나 지난달 ABCP가 상환되지 않았고 지급금 의무를 맡았던 강원도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ABCP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강원도는 논란이 커지자 다음 달 예산을 편성하고 내년 1월29일까지 2050억원 규모의 ABCP를 상환한다는 방침이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