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시작된 가파른 물가 상승은 팬데믹이 끝나면 곧 멈출 것으로 예상됐다. 한편 팬데믹이 수그러듦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물가 상승 압력은 팬데믹 기간 미국에서 이뤄진 전대미문의 방만한 재정지출과 민간소득 이전의 결과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결국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물가 상승 압력이 지난 30년 동안 보지 못한 수준으로 거세지고 있다. 이제 지난 30년 동안의 저물가와 안정적 성장의 시대는 끝나고 고물가 저성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대외경제 여건 변화에 가장 치명적으로 노출된 한국 경제에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먼저 지난 30여년간 세계 경제가 누린 안정적인 물가의 시대는 영원히 끝난 것인가. 근자의 물가 상승 압력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기대는, 팬데믹과 도널드 트럼프가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 그리고 그에 이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충격의 단기적인 여파가 조만간 잦아들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최근의 물가 상승 압력이 이런 일련의 일회적 사건에 따른 결과인지, 혹은 지난 30여년간의 저물가 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 사라진 구조적인 결과인가라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의 물가 상승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현상으로 장기화할 여지가 크다.
위의 의문들에 대한 답은 지난 30여년간의 저물가 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을 밝히면 쉽게 얻어진다. 세계적인 저물가 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첫 번째 요인은 과거 소련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화한 세계 경제질서에 중국과 인도와 같은 저임금 국가들이 편입돼 세계의 공장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즉,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세계적 공급 확대가 저물가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둘째는 1980년대 이후 확산한 세계화와 국제적인 무역장벽 및 각종 규제 철폐는 전 세계적인 노동생산성 증가를 통해 물가의 추가적인 하방 압력으로 작용했다.
한편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저물가 구조를 가능하게 했던 세월은 저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작동하기에는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중국을 대체할 세계의 공장을 찾기 어려워져 지금까지의 저물가 구조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더해 승자독식의 세계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교묘히 이용해 집권한 트럼프가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과 그 이후의 팬데믹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통해 세계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물가 상승은 통제 수준을 벗어났다.
이처럼 공급 측면의 붕괴에서 시작된 물가 상승에 대응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이 일제히 초긴축 금융정책을 펼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난 30여년간의 세계화와 국제적인 경제 통합 및 규제 완화를 통해 가능했던 기술혁신 및 노동생산성 증가 추이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중 무역전쟁이 잦아들더라도 과거의 저물가 구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저물가 시대의 종언은 누리엘 루비니와 같은 직업적인 염세론자의 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구조적 증거들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런 암울해 보이는 세계 경제 환경에서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지난 저물가 구조에 기반한 안정적인 선진국의 수요 증가에 묻어서 순탄한 경제성장을 해온 호시절은 끝났다. 잔치가 끝난 세계에서의 유일한 생존법은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 확보를 위한 처절한 혁신 노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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