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Fed)의 ‘3연속 자이언트스텝’ 결행에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지선인 1400원은 물론이고 장중 1410원대까지 속절없이 무너졌다. 1400원대 진입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6개월 만의 일이다. ‘물가상승률 2%’를 확신할 때까지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제롬 파월 Fed 의장의 한마디에 한국 금융시장이 다시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2%대 진입’은 2025년에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돼 시장에는 ‘긴축의 고통이 더 길고 세질 것’이란 비관론이 넘쳐나고 있다.
원화 가치의 가파른 하락도 그렇지만 외환·통화당국의 강력한 구두개입이 전혀 약발을 받지 못한 것은 우려스럽다. 1400원 저지선이 힘없이 뚫리자 정부는 “펀더멘털에 비해 과도한 쏠림”이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강조했지만 원화 가치는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각종 경제·투자지표도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코스피지수는 최근 7거래일 동안 117포인트 급락했고, 국채(3년물) 금리도 11년여 만에 연 4%대를 뚫었다. 이미 연 6%대인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조만간 7%대를 돌파해 연내 8%대에 진입할 것이란 관측도 나와 영끌 투자자들에겐 직격탄이 될 전망이다. 기준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연체율이 1.8%포인트 치솟는 취약 자영업자들의 고통도 가중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안이한 위기 인식과 대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도 “연준의 긴축이 시장 예상을 뛰어넘은 탓에 변동성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급박한 상황에 비해 한가한 설명으로 들렸다. Fed 안팎에서 ‘인플레 저지가 최우선’이라는 발언이 몇 달 전부터 쏟아졌는데 이제 와 ‘예상 밖 행보’라니, 듣는 사람이 민망스럽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마찬가지다. “당분간 기준금리를 25bp씩 인상하겠다”고 강조한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제조건이 바뀌었다”며 빅스텝(50bp 인상)을 강력 시사하니 당혹감이 커진다.
장기간에 걸쳐 위기가 깊어지고 있지만 대책은 어떤 게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지난 6월 비상경제 체제로 전환하며 대통령이 ‘민생경제회의’를 직접 주재한다고 강조했지만 국민의 불안감을 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저 환율이 오르면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설을 흘리고, 수출이 안 되면 무역금융 지원액을 늘리고, 물가가 다급하면 기업을 압박하는 식의 대증처방만 반복 중이다. 강달러와 인플레이션이 워낙 파상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정부 대책에 일정 한계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정부가 위기 상황을 입체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믿음 역시 미흡하다.
지금 우리 경제는 시계 제로 상황이다. ‘경제 버팀목’인 수출이 6개월 연속 부진해 무역적자가 300억달러에 육박한 상황이라 조그마한 악재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만큼 실물경제도 취약하다. 그런데도 시장의 위기 경고가 나올 때마다 정부는 “건전성 지표가 양호하다”는 말을 반복 중이다. 누리엘 루비니 전 뉴욕대 교수는 “미국 경제가 경착륙하거나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며 글로벌 증시가 50%가량 급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닥터 둠’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긴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는 견해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더 긴장감을 갖지 않으면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던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리는 이들이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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