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간판만 바꿔 달아 일사천리로 통과된 법. 속전속결 처리 과정에서 각국의 로비 진수가 드러난 법. 동맹인 줄 알고 퍼주다 뒤통수 맞은 법.
사실상 '전기차 배터리 보조금법'인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뒤 여러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론 전기자동차 시대로 전환을 알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바이 아메리칸'을 강요하는 법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바이 아메리칸'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어느 나라 못지 않게 미국에 적극적인 투자를 약속했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선 배려를 받지 못했습니다.
전기차만 놓고 보자면 철저히 소외됐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조지아에 전기차 공장을 완공하는 2024~2025년까지 보조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경쟁국들은 실속을 챙겼습니다. 일본은 테슬라와 함께 '노조가 있는 기업이 만든 차'에 추가 보조금을 준다는 조항을 IRA에서 뺐습니다. 전기차 누적 판매량이 20만대가 넘으면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뺀다는 조항도 제외시켰습니다. 캐나다는 보조금 지급 대상을 '미국산 전기차'에서 '북미산 전기차'로 바꾸는데 성공했습니다.
뒤늦게 한국 정부도 나섰습니다. 일단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위반이라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본 유럽연합(EU) 스웨덴 등과도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국은 요지부동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의회 소관"이라 퉁치고 의회는 11월 중간선거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태세입니다.
한국 정부도 난공불락 같은 싸움을 포기하진 않을 방침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실무진이 미국을 다녀간 뒤 통상 수장인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조만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방미 길에 오릅니다.
과연 결과를 바꿀 수 있을까요. 판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한국의 요구사항을 조금이라도 관철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정인설의 워싱턴나우'는 매주 월요일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인 '한경 글로벌마켓'에서 유튜브 영상과 온라인 기사로 찾아뵙고 있습니다.
중국 전기차를 지원하는 법
IRA는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더 나은 재건'(BBB)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이름을 바꿔단 게 주효했습니다. 인플레를 잡겠다는 취지에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요구가 먹히려면 이런 대의명분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법으로 인플레를 잡겠다는 건 허울 좋은 망상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미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미 중앙은행(Fed)이 추가로 돈을 풀지 않아 외관상 인플레를 조장하지 않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중국 부분입니다. 이 법을 통해 과연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느냐입니다. 미국은 이 법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두 가지의 장치를 뒀습니다.
전기차 한 대당 최대 7500달러의 보조금을 받으려면 북미산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등 우려 국가에서 생산된 배터리 광물 및 부품을 쓴 전기차는 보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중국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중국 지리자동차가 소유한 볼보의 전기차가 보조금 대상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볼보의 전기차 S60은 올해도 보조금을 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배터리에만 치중한 나머지 중국 전기차에 대해선 철저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볼보는 스웨덴 기업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도 자국의 고용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뉴욕증시에서 회계 규정을 위반한 중국 기업을 퇴출시킬 때엔 달랐습니다. 당시엔 중국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기업을 중국 기업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이 스웨덴 눈치 보느라 이중잣대를 적용하면 '볼보 딜레마'를 자초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누구도 충족시키기 어려운 난제
배터리만 놓고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적합합니다.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과 중국 견제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비현실적인 규정이 곳곳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IRA에서 규정한 핵심광물 조건은 충족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플레감축법은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주요 배터리 광물을 추출 또는 처리할 때만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미국 또는 FTA 국가 내 비중 요건은 내년 40%로 출발합니다. 2024년 50%, 2025년 60%, 2026년 70%, 2027년 80%로 매년 10%포인트씩 늘어납니다. 아예 '중국이나 러시아 등 우려국가에서 추출 제조 재활용된 핵심광물을 사용한 전기차는 혜택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 같은 광물 관련 조건을 IRA에 삽입한 것은 단순히 완성차를 미국에서 조립하라는 게 아니라 밸류체인 전체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을 제외하기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배터리 광물과 소재의 밸류체인은 이미 중국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벤치마크미네랄인텔리전스 에 따르면 광물 채굴은 중국 비중이 약 20%지만 정제 제련은 90%에 달합니다. 중국 업체들이 세계 각지의 광산 지분을 사들이고, 채굴한 원료를 중국 또는 현지에서 제련해 각지에 공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펑리튬이나 화유코발트 등은 테슬라에도 원료를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업계의 메이저 기업들입니다. 원료 이후 소재 단계인 양음극재의 중국 생산 비중도 60% 수준입니다.
이 때문에 그 어떤 기업도 IRA의 배터리 보조금 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미국 GM과 포드, 스텐란티스와 각각 합작 배터리 회사를 세운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차가 소외된 IRA의 판을 바꿀 수 있을 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