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가격이 아니라 상품 경쟁력을 무기로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서 질주하고 있다. 신차 가격을 경쟁사보다 비싸게 책정하고, 딜러 보조금(인센티브)을 가장 적게 주고 있는데도 차량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보조금을 못 받게 된 친환경차도 차량 품질로 불리한 여건을 상쇄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 업체들에 밀려 ‘마이너 리그’에 머물렀던 현대차그룹이 ‘메이저 리그’로 올라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차, 비싸게 팔아도 많이 팔려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현대차그룹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제품군 부재로 미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업체들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2015년 연간 판매량은 도요타가 250만 대, 혼다 158만 대, 현대차·기아 138만 대였다. 도요타의 절반 수준이었고, 혼다와는 20만 대 차이가 났다.
이날 나온 현대차그룹의 지난달 성적표는 완전히 달랐다. 도요타 16만9626대, 현대차·기아가 13만5526대로, 양사 간 격차는 3만4000대 수준으로 좁혀졌다. 지난 1월 격차(6만3829대)의 절반 수준이다. 7만1461대의 혼다는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판매량으로 제압했다. 현대차그룹의 지난달 미국 시장 점유율은 역대 최고인 12%로 치솟았다.
차량의 경쟁력 자체가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품질 척도인 가격에서부터 경쟁력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 7월 기준 제네시스의 미국 평균 판매가격은 6만573달러로 렉서스 5만5801달러보다 비싸다. 혼다의 프리미엄 브랜드 아큐라는 5만2879달러다. 딜러에게 주는 인센티브도 미국 시장에서 가장 낮다. 보조금을 조금 줘도 차가 잘 팔린다는 뜻이다. 7월 현대차와 기아의 대당 딜러 인센티브는 각각 490달러, 582달러로 도요타 754달러, 폭스바겐 1103달러보다 낮았다. 스텔란티스는 1949달러에 달했다.
SUV, 세단, 픽업트럭 등 다양한 제품군이 고르게 팔리고 있다. 지난달 현대차의 베스트셀링 모델은 콤팩트 SUV 투싼으로 1만4305대가 팔려 전년 동월 대비 28% 증가했다. 아반떼(미국명 엘란트라)도 30% 증가한 1만4238대로 투싼과 쌍벽을 이뤘다. 후발주자로 뛰어든 픽업트럭 시장에서 싼타크루즈가 지난달 2899대 팔리면서 전년보다 132% 급증했다.
○보조금 못 받는 친환경차도 선전
지난달 17일 IRA 시행으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된 현대차·기아의 친환경차들도 선전하고 있다. 지난달 두 회사의 친환경차 판매량은 1만4903대로, 전년 동월보다 79.3% 증가했다. 아이오닉 5 등 순수 전기차가 4078대 팔려 103.9% 늘었고, 하이브리드카는 1만807대로 72.4% 증가했다.다만 8월 실적은 연초 계약분이 인도된 것이어서 IRA 영향이 본격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IRA에 의해 보조금이 제외된 친환경차의 성적표는 내년 초께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희망과 우려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 경쟁력이 높고 다른 업체들도 촘촘한 IRA 보조금 요건을 맞추기 쉽지 않은 만큼 선전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북미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테슬라와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이 3750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현대차그룹이 극복할 수 있는 차이라는 것이다.
반면 친환경차 연간 누적판매량이 20만 대를 넘으면 보조금을 주지 않는 제한이 사라지는 내년엔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관측도 많다. 테슬라와 GM, 포드 등에 해당하는 이 조항이 사라지면 가격 격차가 커질 수 있어서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공학부 교수는 “미국 앨라배마와 조지아의 내연기관차 생산 라인을 전기차로 신속히 변경하는 게 단기적인 해법”이라고 말했다.
박한신/김형규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