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위 vs 38위’.
지난해 한국과 필리핀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순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경제 규모에서 자원 부국인 필리핀에 뒤처졌지만 산업 발전에 성공하면서 1970년 처음으로 필리핀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은 혁신과 늘어난 인구 덕에 지난해 필리핀보다 경제 규모가 4.6배나 큰 세계 주요국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국내 인구가 쪼그라들면서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 규모가 필리핀에 따라잡힐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구·보건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미국 워싱턴대 의과대 산하 보건계랑분석연구소(IHME)는 2020년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GDP 순위가 2100년까지 20위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필리핀은 18위로 올라설 것으로 예측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필리핀과 경제 규모가 재역전될 정도로 한국의 경제력이 약해지는 근본적 원인은 저출산·고령화다. IHME는 한국 인구가 저출산으로 인해 2100년 2678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5174만 명)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필리핀은 2017년 1억347만 명에서 2100년 1억6946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IHME는 내다봤다. 한국은 현재 호주, 나이지리아 등에 경제 규모 면에서 앞서고 있지만 2100년엔 뒤처질 것으로 예상됐다.
같은 기간 인구가 3억2484만 명에서 3억3581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GDP 순위는 2100년에도 계속 1위를 달릴 것으로 관측됐다. 2100년까지 인구가 14억 명에서 7억 명으로 줄어드는 중국은 2050년 일시적으로 GDP 1위를 기록하다가 2100년 다시 2위로 내려앉는다고 IHME는 예측했다.
세계은행은 1998년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1965~1990년 동아시아 지역의 ‘기적(miracle)’과 같은 경제 성장의 약 3분의 1이 인구 증가로 인해 달성됐다고 분석했다. 이미 작년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된 한국은 과거와 같은 인구 증가 효과를 볼 수 없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향후 한국 경제의 침체를 유발하는 직접적 요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생산연령인구(15~64세) 감소가 노동 투입과 자본 축적, 투자, 소비 감소를 유발하고 생산성까지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은 2017년 발간한 ‘저출산·고령화의 경제적 영향분석과 정책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생산연령인구 비율이 0.1%포인트 감소하면 GDP는 연평균 0.3%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에서 생산연령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해 71.4%에서 2050년 51.1%로 감소하고, 2070년엔 46.1%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지난해 16.8%에서 2050년 40.1%, 2070년 46.4%로 치솟을 예정이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자산관리학과 교수는 “일본은 생산연령인구가 1995년부터 급격히 감소했는데 생산연령인구 비중이 낮아지면서 1인당 실질 GDP 증가율도 하락했다”며 “한국은 일본에 비해 약 21년의 후행성을 보이는 점에 비춰볼 때 곧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