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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마르크스의 사위가 역설한 '게으를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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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절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출간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공산주의 이념이 노동계급이 자본가를 이길 ‘게임 체인저’ 사상이 되기를 바랐다. 공산주의가 공격할 대상에는 가정도 포함됐다. 마르크스가 서른살 때 지은 이 글에서 두 저자들은 “부르주아지는 가정을 감싸는 감성적인 베일을 찢어버리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축소시켰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 본인이 꾸린 가정에는 감성과 돈 둘 다 넉넉했다. 마르크스는 독일 정통 귀족 가문 출신을 부인으로 얻었다. 부부의 금실은 좋았다. 두 사람은 독일 공산주의자도 편안히 살게 내버려두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나라 영국으로 1849년 피신해 온 뒤 처음에는 다소 곤궁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행운은 곧 찾아왔다. 1856년 장모가 죽으며 넉넉한 유산을 남겨준 것이다. 그 덕에 마르크스 부부는 런던의 방 7개짜리 근사한 집에서 살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돈이 부족할 때면 친구 엥겔스의 도움을 받았다.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면서도 맨체스터에서 노동자들을 부리며 공장을 경영했기에 돈이 넉넉했다. 공산주의의 원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원조 ‘강남좌파’다. 이들은 ‘내로남불’을 거리낌 없이 실천했다. 이들의 사상은 심오하고도 급진적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혜택을 누리는 데 있어서는 주저함이 없었다.

마르크스 부부는 아들 없이 딸만 셋을 키웠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딸들은 좌익 청년들하고만 결혼했다. 둘째 딸 제니 로라의 배필은 프랑스인 사회주의 문필가인 폴 라파르그. 라파르그의 대표 저서는 <게으를 권리(Le Droit a la paresse)>(1883년)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명저다.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제까지는 부르주아지들만 게을리 빈둥거리며 즐기고 살았으나, 프롤레타리아여, 그대들도 게으르게 잘 먹고 잘 마실 권리가 있다. 장시간 초과 근로해서 과잉생산해봤자 창고에 재고만 쌓인다. 그 결과 경제 위기가 닥치고, 그대들은 해고된다. 그대들을 부려 먹는 자본가 계급은 과잉소비를 하느라 몸들이 망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대들에게만 근면을 강요한다. 이제 근면의 환상에서 깨어나라! 일거리와 일자리를 달라고 아우성치지 말고, 빈둥거릴 권리를 주장하라! 산업화로 발전한 생산력 덕분에 하루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

라파르그의 조국 프랑스가 그의 충고를 처음 받아들인 해는 1936년, 좌파 정당 연합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다. 이 해 프랑스는 15일 유급 휴가를 법으로 보장했다. 그로부터 다시 20년 뒤인 1956년에 1주가 더 늘어 3주, 1969년에 또 1주를 추가해 4주, 1982년 사회주의자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자 다시 1주를 추가해 5주로 늘어났다.

프랑스 근로자들이 즐기는 5주의 여름휴가는 그야말로 ‘게으를 권리’의 환상적인 실현이라고 함직하다. 서구 선진국 중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나라인 미국도 최소한 1주일씩은 여름휴가를 간다. ‘빨리빨리’ 정신으로 달려온 ‘워커홀릭’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법정 유급휴가는 15일이다. 이 15일을 몰아서 여름에 쓰는 근로자는 극히 드물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5인 이상 80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올해 여름휴가 일수는 평균 3.6일이었다. 서구 국가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짧다.

대한민국에서도 게으를 권리를 누리는 이가 없지는 않다. 이들은 법이 보장한 휴가를 찾아 먹는 데 머물지 않고 보다 능동적으로 게으를 권리를 쟁취한다. 단, 이들은 생존이 위태로운 프롤레타리아 처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 언론사 보도에 따르면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6개 부서장들은 7월 24일 점심시간 이후 모두 사무실을 떠났다. 일부는 아예 전날부터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이 기관의 다른 간부 3명은 7월 중순 제주도에 ‘신재생에너지 견학’ 출장을 갔으나, 예정된 견학 현장으로 가는 대신 골프장으로 직행했다. 게으를 권리를 탁월하게 실천하는 이분들은 혹시 라파르그의 저서를 읽고 영감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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