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의 너른 무대 전체에 ‘댄스플로어(무용 매트)’가 깔렸습니다. 무대부터 뒤쪽 합창석 벽까지 평소 보던 나무 색깔이 아닙니다. 무대 양쪽에 거대한 스탠딩 스피커 넉 대씩 모두 여덟 대가 마치 세트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클래식음악 전용홀인 롯데콘서트홀에서 무대에 연주자 대신 스피커가 있는 풍경은 처음 봤습니다. 28일 ‘파리 오페라 발레 2022 에투알 갈라’ 첫 서울 공연이 펼쳐진 무대 현장입니다.
발레 갈라 공연은 자주 접하지 못했습니다. 파리 오페라 발레 같이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최정상급 발레단도 갈라 공연을 할 때는 보통 MR(녹음된 음악)을 쓰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5일 간담회에서 물어봤습니다. 박세은은 “이번에 ‘인 더 나이트’와 ‘빈사의 백조’(첼로 ,피아노)에 ‘달빛’까지 세 작품은 피아노 반주로 한다. 갈라에 오케스트라를 대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전에 홍콩과 일본에서도 MR로 했다”고 답했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1부에 세 편, 2부에 일곱 편 등 모두 열 편이 올랐습니다. 이중 일곱 편이 MR공연입니다. 무대에 오르는 무용수는 모두 10명. 에투알(수석무용수) 다섯 명, 프리미에르 당쇠르(제1 무용수) 세 명, 쉬제(솔리스트) 두 명입니다.
갈라답게 클래식·모던·드라마(연극적) 발레 작품을 고루 배치했습니다. 이번 갈라 공연을 이끈 발레 마스터 리오넬 델라노에의 말대로 파리 오페라 발레가 가르니에 극장과 바스티유 극장에 올리는 시즌 레퍼토리 중 한 시대를 풍미한 안무가들의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정수를 보여 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잘 짰습니다.
대부분 실연으로 처음 보는 작품이어서 신선했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먼저 라이브 반주 작품들을 보겠습니다.
1부 마지막 편인 ‘인 더 나이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왕과 나’ 등 뮤지컬 안무가로도 친숙한 제롬 로빈스의 1970년 작입니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에 파티장에서 빠져나온 남녀 세 커플이 부드럽고도 복잡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남녀 관계의 다양한 상황을 보여준다”(정옥희 무용평론가가 쓴 프로그램 노트)는 작품입니다.
역시 갈라답게 공연 내내 별다른 세트 없이 조명으로만 분위기를 냈는데 이 작품에서만 합창석 쪽에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장치를 했습니다. 좀 어설프긴 하지만 별빛이 비치는 파티장 야외 같습니다. 발레단 전속 피아니스트 엘레나 보네이가 쇼팽의 녹턴을 연주합니다. 첫 커플 박세은-폴 마르크는 7번 c샾 단조, 두 번째 커플 발랑틴 콜라상트-제르망 루베는 15번 f 단조, 마지막 커플 도로테 질베르-제레미 로프 퀘르는 16번 E플랫 장조에 맞춰 춤을 춥니다. 각 커플의 상황이 어떤지는 춤에서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별빛이 쏟아지고 녹턴이 흐르는 낭만적인 밤에 가장 어울리는 춤은 첫 커플입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커플인데 음악에는 슬프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정조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들의 춤엔 순수한 사랑과 뜨거운 격정이 느껴지다가도 뭔가 모를 불안감과 고뇌가 비칩니다.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벽을 넘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커플은 격식 있는 춤입니다. 안정되고 행복해 보입니다. 피겨의 아이스댄싱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격식을 차리는 만큼이나 마음의 거리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춤의 감정 표현은 직설적입니다. 앞의 두 춤은 보는 이마다 조금씩은 다른 생각이 들 법한데 이 춤은 다들 비슷하게 느낄 것 같습니다. 이 커플은 좀처럼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외면한 채 춤을 춥니다. 감정이 격해져 상대를 내버려 두고 뛰쳐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당장이라도 파탄이 날 것처럼 아슬아슬합니다.
마지막에 세 커플은 녹턴 2번에 맞춰 연이어 등장해 파티장에서 알게 된 것처럼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다양한 사랑의 감정과 관계를 보여주는 한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본 듯합니다. 박세은, 콜라상트, 질베르 등 에투알들의 연기력이 빛났습니다.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해 전달하는 능력이 역시나 탁월했습니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 중 고국 팬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 파리 오페라 발레 무용수들이 특히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뭔지 콕 집어 얘기해 달라고 했을 때 박세은은 이 작품을 꼽았습니다. “처음 봤을 때 완전히 반했다”며 “쇼팽의 음악이 흐르는 데다 섬세하고 우아하고 극적인 점이 프랑스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스타일까지는 잘 모르겠고, 처음 봤을 때 완전히 반할 만한 춤과 스토리가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20분 휴식 후 두 편의 독무로 2부가 시작됐습니다. 드뷔시의 ’달빛‘ 연주에 맞춰 예술작품에 나오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잘생긴 남신(男神) 같은 외모와 몸매의 에투알 제르망 루베가 홀로 춤을 춥니다. 프로그램 노트를 보면 안무가 알리스터어 메리어트는 ‘빈사의 백조’ 남성 버전을 의도했다는데 별로 공감은 가지 않았습니다.
달빛에 홀려 숨질 때까지 춤추는 콘셉트인가요. 음악과 달빛의 매혹적인 분위기에 그야말로 매혹적인 춤을 이어가다가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지젤’의 윌리 전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어진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미하일 포킨의 ‘빈사의 백조’입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첼리스트 문태국이 연주하는 생상스 ‘백조’ 선율에 맞춰 15년차 베테랑 에투알 도로테 질베르가 우아하게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대에서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가 연주하고 그 앞에서 우아한 백조 한 마리가 몸짓하는 광경은 숨 멎을 듯 아름다웠습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간판 중 한 명인 질베르는 역시 대단하다는 감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2부 후반부 ‘아모베오’ 파드되에선 토슈즈를 벗고 솔리스트 플로랑 멜락과 함께 현대무용에 가까운 2인무를 췄습니다. 필립 글래스의 현대음악에 맞춰 물속에서 또는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는 듯이 느리고 끈적끈적한 동작을 보여주다가도 곡예 같은 현대무용 동작도 능수능란하게 해냅니다.많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드라마 발레에 가까운 ‘인 더 나이트’와 클래식한 ‘빈사의 백조’, 모던한 ‘아모베오’까지 한 무대에서 3색(色) 레퍼토리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플로랑 멜락은 이번 공연에서 컨템포러리 파드되를 도맡았습니다. 록산느 스토아노프와 함께입니다. 1부 ‘애프터 더 레인’에선 아르보 패르트의 명곡 ‘거울 속의 거울’에 맞춰 비 갠 후의 나른함을 곡예적인 동작으로 표현하더니 2부 롤랑 프티의 ‘랑데부’에선 뛰어난 연기력으로 보헤미안 청년 역을 소화해냅니다.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록산느 스토아노프의 팜파탈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반면 스토아토프와 같은 프리미에르 당쇠르인 엘루이즈 부르동은 ‘발레의 종가’를 대표할 만한 클래식 발레의 화려한 고난도 테크닉을 전담했습니다. 1부 첫 프로그램인 조지 발란신의 ‘한 여름밤의 꿈’ 중 디베르티스망 파드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3막 파드되에서입니다. 두 파드되에 모두 나오는 ‘프로므나드’ 등 고도의 균형감각을 요구하는 아카데믹한 동작들을 더없이 아름답게 보여줬습니다.
피날레는 박세은이 지난해 6월 10일 에투알 지명을 받은 무대에서 췄던 루돌프 누레예프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하이라이트인 발코니 파드되입니다. 파트너는 당시 로미오 역의 폴 마르크입니다. 박세은은 “심정지가 올 만큼 숨차고 힘들다”고 했고, 프로그램 노트에는 “한 호흡도 멈출 수 없기에 엄청나게 강도가 높은 춤”이라고 했습니다. 직접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파드되 중 가장 빠른 스텝으로 많이 뛰고, 숨돌릴 새가 별로 없는 파드되였습니다. 줄리엣과 로미오가 연속적으로 그랑 주테(다리를 앞뒤로 크게 벌리고 뛰는 동작)를 번갈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뛰는 와중에도 발코니 장면의 가슴 설레며 ’밀당‘하다가 밀어를 나누고, 애정 표현을 하다가 헤어지는 연기와 그런 감정을 표현해야 하니 난도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 에투알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연기를 펼쳐냈습니다.
‘명불허전’입니다. 세계 최고(最古)이자 최정상급인 발레단의 수준과 기량을 확인하고 그들만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MR의 한계입니다. 편성이 적은 모던발레 작품에서는 크게 못 느꼈습니다만,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이 대편성 오케스트라 반주 MR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음악에서 확실히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일부 대목은 귀에 거슬릴 정도였습니다. 춤을 감상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라이브 반주 작품과는 공연의 질에서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롯데콘서트홀에서 MR로 하는 공연이 극히 드물어서일까요. 무대 양쪽에 편중된 스피커 음향의 공연장 울림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음악회 전용인 이곳에서 발레 갈라 같은 무대 공연은 충분히 올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만 MR을 쓰는 공연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