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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싼 나라가 돼버린 일본…"해외여행이 무서워요"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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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태국 현지에서 대표 요리인 톰양쿵을 565엔(약 5406원)이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 초에는 920엔으로 올랐고, 엔화 가치가 20% 떨어진 지금은 1000엔을 내야 맛볼 수 있다.

태국은 즐길 거리가 많은데 비해 물가가 저렴해 일본인들의 인기 관광지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태국 물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올들어 엔화 가치가 약 20% 가까이 떨어진 탓이다.



태국식 덮밥인 가파오 가격인 10년전엔 130엔이었는데 올초에는 200엔, 현재는 220엔이다. 10년새 먹거리 가격이 2배, 그 가운데 지난 반년 동안에만 20% 오른 것이다. 일본의 태국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인 망고트리카페에서 '톰양쿵 누들' 메뉴 가격은 1210엔(평일 점심 기준)이다.

세계의 물가를 비교할 때 자주 쓰는 빅맥 가격이 일본은 390엔이다. 세계 33위다. 태국은 443엔으로 25위다. 중국과 한국이 440엔대로 뒤를 잇고 있다.



다른 나라들의 물가는 꾸준히 올랐는데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 동안 물가가 오르지 않다보니 어느새 '싼 나라'가 돼 버렸다. 올해는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더 싼 나라가 됐다.

그 결과 10~20년 전만 해도 '국내여행보다 해외여행이 훨씬 싸다'며 세계 곳곳을 누볐던 일본인들에게 외국은 큰 맘 먹고 나서야 하는 곳이 됐다. 최근 일본 미디어들은 "해외여행은 부유층의 특권이고, 일반인들은 신혼여행으로 가고시마나 도쿄 근처 온천가인 아타미를 가던 1960~70년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라고 우려한다.

해외여행이 과거와 같이 만만한 여가수단이 아니게 되다 보니 일본에서는 의외의 산업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해외 여행지에서 비싼 물가에 움츠러드느니 차라리 국내 여행을 풍족하게 하겠다는 소비자를 타깃으로 하는 상품이 등장했다.



나고야의 백화점 마쓰자카야는 '애스틴마틴으로 떠나는 궁극의 교토'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내놨다. 1박2일 코스가 1인당 38만엔인데도 의외로 잘 팔린다는 설명이다. 마쓰자카야 관계자는 경제 전문 뉴스 WBS에 "엔저의 영향으로 올 여름은 해외여행을 망설이는 사람이 늘지 않을까해서 국내 여행 상품을 내놨다"고 밝혔다.

1개에 수천만원씩 하는 명품시계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엔화 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지니 수입가격은 점점 오르고 있다. '해외여행 대신 명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수요도 증가 추세다. 그러니 '오늘이 제일 싸다'며 가격이 오르기 전에 명품 구매 행렬에 줄을 선다는 것이다.



일본의 가격이 싸다보니 해외에서 '직구'하는 수요도 늘고 있다. 일본의 명품 전문 매장에서 롤렉스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는 5만123달러(약 6504만원)에 판다. 반면 미국 현지 매장에서는 같은 상품이 5만9950달러로 1만달러 가까이 비싸게 팔린다. 미국과 홍콩 등 세계 각지에서 주문이 몰리고 있다고 업계 관계자는 설명했다.

일본시계협회는 2021년 손목시계 시장 규모가 7139억엔으로 1년 전보다 15% 커진 것으로 추산했다. 일본백화점협회에 따르면 5월 백화점 매출은 3882억엔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7.8% 늘었다.



'싼 나라 일본'은 아이폰 가격을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일본 시장조사업체인 MM종합연구소가 34개 주요국의 최신 기종 아이폰 가격을 조사한 결과 일본이 가장 쌌다.

작년 9월 발매된 아이폰13(128GB)은 일본 판매가격이 9만8800엔으로 유일하게 10만엔 이하였다. 미국은 11만엔대, 영국과 독일 등 유럽은 12만엔대였다. 12만6433엔인 세계 평균보다 2만7000엔(21%)쌌다. 가장 비싼 브라질은 대당 가격이 20만7221엔으로 일본의 2.1배였다.

고가 모델인 '아이폰13프로맥스(1TB)'와 저가형 모델인 'SE3(64GB)'의 가격 역시 일본이 19만4800엔과 5만7800만엔으로 모두 34개국 최저였다. 34개국 평균 가격은 25만6813엔과 7만609엔이었다. MM종합연구소는 "만성 디플레에 시달리는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가격을 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지 않아도 쌌던 일본의 아이폰 가격은 엔화 약세로 더 싸졌다. 정확히는 다른 나라의 아이폰 가격이 상대적으로 더 비싸졌다. 작년 9월 발매 당시 환율로는 홍콩의 아이폰13 가격(9만6692엔)이 일본보다 쌌다. 하지만 엔화 가치가 20% 가까이 떨어지면서 홍콩의 가격이 일본을 앞질렀다.

달러가 엔화당 110엔이었던 올초 아이폰13을 9만8800엔에 팔면 애플의 미국 본사는 898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환율이 135엔인 지금은 대당 매출이 735달러로 163달러나 줄었다.



결국 애플은 2020년 11월 출시한 맥북에어의 가격을 11만5280엔에서 최근 13만4800엔으로 2만엔 올렸다. 오는 7월 출시하는 신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가격을 5만엔 올린 16만4800엔에 내놨다. 아이폰13 가격 또한 7월1일부터 11만7800엔으로 19% 인상했다.

엔화 가치 급락은 일본의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생활고는 곧바로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6월20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전화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의 지지율은 60%로 지난 5월(66%)보다 6%포인트 하락했다.



엔화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건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은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리는데 일본은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엔화 급락을 멈추려면 일본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등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달 17일 금융정책결정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일본에게 남은 수단은 구두개입과 외환시장 직접 개입 정도다.



지난달 10일 일본 재무성과 금융청, 일본은행 등 통화정책을 관리하는 정부 부처가 모두 모여서 긴급 회의를 열고, 이례적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을 통해 일본 통화당국은 "최근 외환시장에서 엔저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어 우려스럽다"며 "필요한 경우 적절한 대응을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환시장에서 통화당국의 '우려'는 상당히 강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자회견에 나선 간다 마사토 재무성 재무관은 외환시장에 개입할 가능성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날 일본 통화당국의 강도높은 구두개입은 효과를 발휘했을까. 10일 오후 2시 재무성이 3개 부처 공동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한 직후 엔화 가치는 0.4엔 올랐다. 오후 4시경 '우려'라는 표현을 담은 성명문이 나오자 엔화가치는 0.5엔 추가로 절상돼 133.3엔까지 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엔화 가치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고, 지난달 29일에는 137엔대까지 떨어졌다.

일본 통화당국이 강한 표현을 써가며 성명문을 냈지만 정작 영어 번역문은 발표하지 않았다. 외환거래의 한 축인 해외 투자가는 놔두고 국내 시장 참가자에게만 구두개입을 한 것이다. 7월10일 있었던 참의원 선거를 의식한 국내용 이벤트였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마지막 남은 엔화 방어수단은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엔화를 직접 사서 인위적으로 엔화 강세를 만드는 조치다.



일본 정부가 마지막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1998년 6월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엔화를 2조엔어치를 사들이고도 환율 방어에 실패했다. 그해 8월에는 엔화 가치가 147.64엔까지 떨어졌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다. 외환시장에 개입하려면 상대방인 미국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면 달러 가치는 떨어진다. 40년 만에 최악의 물가상승에 시달리는 미국이 수입물가를 더 치솟게 만들 달러 약세에 동의할 리 없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10일 발표한 '반기외환보고서'에서 "외환시장 개입은 매우 예외적인 환경에 대해 적절한 사전협의를 거친 경우에만 실시될 것으로 강하게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8년 일본이 마지막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을 때는 미국 정부도 동의했다. 일본 대형 금융회사들의 파산으로 금융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몰린 매우 예외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나홀로 금융완화를 고집하는 현재 일본의 상황을 '매우 예외적인 환경'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없다.

엔화 가치가 24년전 최고치인 147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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