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사는 억대 연봉 전문직 박모씨(47). 그는 게임 ‘미르4’의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지난달 100만원 이상 결제했다. 작년에는 전투력 향상을 위해 500만원을 들여 PC를 ‘고성능’으로 교체했다. 박씨는 “‘리니지 혈맹(함께 게임을 즐기는 집단)’에선 월 1000만원을 쓰는 40대 테크 기업 대표도 있다”며 “나의 만족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최초의 소비 세대
40대는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개인주의 세대”(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란 평가를 받는다.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공중전화→삐삐→시티폰→휴대폰으로 이어지는 기술의 진화도 모두 경험했다. 나를 위해 소비하는 데 눈치 안 보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이런 DNA는 30년이 지난 지금 막강한 구매력으로 발현한다. 정치적으론 진보 성향을 띠면서 경제적으론 개성적 소비로 시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영포티(Young Forty·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대)’다.
소비 시장에서 이들의 존재감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우선 많이 번다. 17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으로 가구주가 40대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1인 이상, 농림어가 포함)은 625만원이다. 사상 처음으로 600만원을 넘어섰다. 50대 가구 소득 587만원보다 38만원(6.4%), 30대 가구 소득 474만원보다 151만원(31.8%) 많다.
지출 규모도 크다. 40대 가구의 월평균 지출은 466만원으로 50대(431만원)와 30대(336만원)를 훌쩍 뛰어넘는다. 여기엔 각종 세금과 사회보험료 등 비소비지출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소득 대비 22.3% 비율로 포함돼 있다. 전 연령대 중 가장 높다.
◆‘욜로 소비’ 추구하는 40대
그렇다고 40대가 세금, 교육비에 허덕대면서 허리띠 졸라매고만 사는 건 아니다. 송파구 박씨의 사례처럼 ‘나 자신을 위한 소비’에도 거리낌이 없다.신한카드가 지난 3~4월 신용카드 이용자들의 소비 성향을 분석한 결과 욜로 소비의 대표 항목인 △가사노동 플랫폼 △필라테스·요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분야에서 결제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사노동 플랫폼의 경우 이용자 중 40대 비중이 42%로 가장 많았다. 30대(29%), 50대(15%)보다 월등히 높았다. 필라테스·요가 같이 자신을 가꾸기 위한 운동을 즐기는 것도 40대의 두드러진 점이다. 이들 종목의 학원 이용자 가운데 40대 비중은 30%로 1위다.
40대는 다른 연령대보다 콘텐츠 소비에도 적극적이다. OTT 이용자 중 30대와 40대가 각 33%로 나란히 1위에 올랐다.
30대 비중은 2019년보다 8.1%포인트 줄어든 반면 40대는 3.9%포인트 더 늘었다. 신사임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 부부장은 “40대는 가족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적극적 소비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각인된 ‘X세대 DNA’
지금의 40대는 10~20대였던 1990년대 ‘X세대’로 불렸다. ‘기성세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미지수를 가리키는 알파벳 X가 붙었다. X세대는 근검절약이 미덕이었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소비가 익숙했다.이는 40대의 성장기에 한국 경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77년 1000달러에서 1994년 1만달러로 올라섰다. 1970년대생들은 빈곤국에서 태어나 ‘폭풍 경제 성장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들을 희생해왔던 윗세대와 달리, 시대적 과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세계화’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글로벌 감각을 몸에 익힌 것도 지금의 1970년대생들이 처음이다.
이제 이들은 40대가 돼 막강한 구매력을 등에 업고 소비시장의 트렌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코로나19 창궐 후 최근 1~2년 새 소비 키워드로 떠오른 중고 거래, 비건, 명품 등은 대부분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방아쇠를 당기고 40대가 정착시켰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40대는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며 “진보적인 정치적 성향과 왕성한 소비성향이 동시에 만들어진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하수정/빈난새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