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집만 한 곳이 없다(There’s no place like home)”고 말하는 도로시의 집은 캔자스주 시골에 있다.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 캔자스주는 세계 2위 밀 수출국인 미국의 최대 밀 생산지다. 하지만 올해 작황은 최악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지난해 10월부터 눈이나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어서다.
또 다른 생산지인 오클라호마와 텍사스 상황도 비슷하다. 미국 전체 밀 생산량의 절반가량이 제빵용 강력분으로 가공되는 경질붉은겨울밀이다. ‘식탁에서 빵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가 농담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세계 곳곳에서 ‘밀가루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밀 수출량의 30%를 차지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공급망이 붕괴한 와중에 폭염과 가뭄 등 이상기후까지 겹쳤다. 세계 밀 비축분(생산량 제외)은 1~2개월 안에 바닥을 드러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3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7월 인도분 밀 가격은 0.11% 오른 부셸(약 25.4㎏)당 10.86달러에 마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지난 3월 초엔 12달러를 넘어서며 14년 만에 최고가를 찍었다. 이후 안정세를 되찾았다가 지난달 중순 12달러대에 재진입했다. 올해 상승률은 43%에 달한다.
밀은 쌀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곡물이다.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쌀 소비가 압도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구인의 주식은 밀인 셈이다. 2019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자료에 따르면 밀 공급량의 68%가 식량으로 사용된다.
빵 국수 등으로 세계인의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밀이지만 최근 재고 상황은 심상치 않다. 농업시장조사업체 그로인텔리전스는 지난달 19일 기준 세계 밀 비축량이 10주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통상 밀 비축량은 연간 소비량의 33% 수준인데 20%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로인텔리전스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비료가 부족한 데다 세계 밀 생산지의 가뭄이 20년 만에 가장 극심하다”고 했다.
세계 5위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구가 러시아군에 의해 봉쇄된 것은 치명적이다. 밀을 포함해 우크라이나산 곡물 98%가 흑해 항구를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로 수출되기 때문이다. 철도 등 육로를 이용하면 수송 가능 물량이 크게 줄어든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이달부터 1년간 세계 밀 생산량은 전년 동기 대비 0.57% 감소한 7억7480만t에 그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의 밀 생산량 감소율은 35%로 주요 수출국 가운데 가장 크다.
폭염과 가뭄도 밀 농사를 망치고 있다. 올해는 지구 온난화에 더해 라니냐 현상이 3년 연속 발생할 가능성까지 제기돼 흉작 우려가 커지고 있다. 라니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는 적도 무역풍이 강해지면서 동태평양 수온이 평년보다 낮아지는 현상이다. 라니냐 때문에 캔자스 등 미국 중서부 지역에선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미 농무부는 “미국 밀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질붉은겨울밀 수확량이 지난해보다 21%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2위 밀 생산국인 인도는 4월부터 50도 안팎으로 기온이 치솟자 올해 밀 생산량 전망치를 10% 하향 조정했다. 유럽 최대 밀 수출국인 프랑스와 중동 최대 밀 생산국인 이란도 가뭄으로 시름하고 있다. 인도가 지난달 밀 수출 금지령을 내리는 등 각국의 식량보호주의 움직임도 공급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
피해는 밀 수입 의존도가 큰 아프리카 국가에 우선 나타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유엔에 따르면 아프리카 국가의 러시아·우크라이나산 밀 수입량은 전체의 44%(2018~2020년 기준)에 이른다. 아프리카개발은행은 “아프리카 대륙의 밀 가격이 45% 상승했다”며 “모리타니의 쿠스쿠스(으깬 밀로 만든 아프리카 음식)부터 콩고의 도넛까지 모든 것이 비싸졌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 등도 피해에서 예외일 수 없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