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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고 앙증맞은 '고집쟁이 딸'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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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발레 공연은 참 오랜만입니다. 보는 내내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마음에 거슬리거나 불편한 캐릭터나 장면이 전혀 없는 ‘착한 발레’입니다. 현존하는 전막 발레 중 가장 오래됐다고 해서 지나치게 예스럽거나 요즘 정서에 맞지 않은 대목이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안무와 음악을 입은 ‘고집쟁이 딸’은 오히려 참신하고 현대적이었습니다.

8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찾았습니다. 국립발레단이 국내 초연하는 프레데릭 애슈턴 안무 버전 ‘고집쟁이 딸’의 첫 공연 현장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1789년 7월 1일 프랑스 안무가 장 베르셰 도베르발(1742-1806)이 보르도에서 초연한 ‘지푸라기 발레’입니다. 국립극장 블로그에 무용연구가 정옥희가 쓴 글에 따르면 도베르발은 시골 헛간에서 엄마에게 혼나고 있는 딸 뒤로 연인이 도망치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대본은 극작가 파바르 부부가 썼습니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부유한 농장 주인인 홀어머니 시몬이 철없는 외동딸 리즈를 부잣집의 얼빠진 아들 알랭과 결혼시키려 합니다. 리즈는 연인인 젊은 농부 콜라스와 엄마 몰래 만나고 사랑을 나눕니다. 결국 엄마는 리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두 연인의 결혼을 인정하는 스토리가 유쾌하고 코믹하게 펼쳐집니다.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1791년 런던 공연에서 ‘고집쟁이 딸’이란 제목이 붙었습니다. 러시아에선 ‘헛된 경고’란 제목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후 살바토레 비가노, 마리우스 프티파, 브로니슬라바 니진스키를 비롯해 많은 안무가가 파바르 부부의 대본으로 재안무했습니다.
국내에선 국립발레단이 2003년 10월 필립 알롱소의 안무를 바탕으로 한 쿠바 버전으로 이 작품을 처음 올렸습니다. 저도 당시 김주원이 타이틀롤을 맡았던 공연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이번에는 애슈턴이 재안무해 1960년 초연한 영국 로열발레단 버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인기가 높은 버전이고 합니다.

이제 공연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첫 무대의 연인은 박슬기(리즈)와 허서명(콜라스)입니다. 지난 3일 후배 기자와 함께 박슬기 수석무용수를 만났는데 이때 나눈 얘기를 도움말 삼아 공연을 따라가겠습니다.



한적한 농촌 풍경이 그려진 막을 배경으로 서주가 흐릅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현악 선율 위로 새 소리를 흉내 내는 듯한 플루트 등 관악 선율이 어우러지며 그림 속 평화로운 전원 마을로 안내합니다.
막이 열리면 시몬의 농장 마당입니다. 무대 세트가 사실적이고 정교합니다. 수탉과 암탉 다섯 마리의 코믹한 춤에 이어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동작과 춤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합니다. 리즈와 시몬의 티격태격에 이어 콜라스까지 포함한 세 사람의 한바탕 좌충우돌이 벌어진 후 드디어 두 연인의 ‘리본 파드되’가 펼쳐집니다. 서주의 아름다운 현악 선율이 다시 흐릅니다. 두 연인의 ‘사랑 테마’인가 봅니다.

리본은 1막의 가장 중요한 오브제입니다. 두 연인의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리즈는 앞서 마치 리듬체조선수가 리본 경기를 펼치듯 혼자서 갖고 놀았던 리본으로 이번엔 콜라스와 변화무쌍한 감정을 나눕니다. 서로를 묶고 풀고 엮고 실뜨기도 합니다. 리본을 밟고 회전하며 콜라스에게 다가가는 리즈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박슬기는 “리본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묶고 풀고 모양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며 “리즈의 춤 자체는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리본 등 소품이 변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리본을 놓치거나 제때 풀리지 않거나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낭패죠. 실수 없이 하는 것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해내는 게 관건일 텐데요. 두 연인은 멋지게 해냈습니다. 연습량을 짐작게 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파드되 걸작들 중에서도 박슬기와 허서명이 보여준 ‘리본 파드되‘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1막 2장에선 가을 수확 축제가 펼쳐집니다. 축제에는 춤이 빠질 수 없죠. 이 작품의 주목할 만한 춤 장면이 몰려 있는 장입니다. 여기서도 리본이 빠지지 않습니다. 리즈와 콜라스의 이른바 ‘파니 엘슬러 파드되’에서 여덟 명의 무용수들이 리본을 들고 함께 춤추며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박슬기가 “인간 실뜨기”라고 농담처럼 표현한 장면인데 장관입니다.
‘파니 엘슬러 파드되’는 그랑 파드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고전 발레만큼 ‘그랑(grand)’ 하지는 않습니다. 길이부터 상대적으로 짧죠. 이 작품이 드라마를 중시하는 연극적인 발레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난도의 화려한 기교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축제 막바지에는 리본 기둥도 등장합니다. 기둥에 원 모양으로 매인 수많은 리본을 마을 사람들이 엮고 풀고 하는 장면도 볼거리입니다. 여기서 리본도 앞서 두 파드되와 비슷하게 두 연인을 이어주는 사랑의 오브제로 보입니다.



애슈턴 버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나막신 춤'은 독특합니다. 시몬이 여러 친구와 함께 나막신을 신고 추는 장면입니다. 남자 무용수가 연기하는 시몬의 희극성이 도드라집니다.
애슈턴이 영국 민속무용을 차용해 안무했다고 하는데 저는 탭댄스의 전설인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대중적인 춤동작을 발레공연에서 보다니 신선했습니다. 이 장면뿐 아니라 극적인 여러 군무신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뇌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알랭이 빨간 우산을 타고 날아가는 동화 같은 장면으로 1막을 끝맺는데요. 1막 피날레를 최대한 스펙터클하게 마무리하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뮤지컬을 연상시킵니다.



2막의 감상 포인트는 시몬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코믹한 상황과 주역들의 마임 연기입니다. 연극적인 재미가 쏠쏠합니다. 시몬 역의 배민순과 박슬기가 함께 물레에서 실을 잣으며 신경전을 벌일 때 객석에서 많은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재미를 듬뿍 느낄 수 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허서명과 알랭 역의 선호현 등 주요 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의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 능력이 상당합니다.

드라마에 음악과 마임, 춤이 착착 달라붙었습니다. 원작 초연은 프랑스 대중가요 50여 곡을 섞은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애슈턴 버전은 페리디낭 헤롤드가 1828년 파리 공연을 위해 만든 곡을 위주로 해서 존 랜치베리가 편곡한 음악입니다. 랜치베리는 ‘나막신 춤’ 음악은 새로 작곡하고, 곳곳에 로시니와 도니체티의 오페라 선율을 차용했다고 합니다.
영국 버밍엄 로열발레단 지휘자인 필립 앨리스가 이끄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참 좋았습니다. 음악과 무대 연기의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특히 드라마를 받치는 플루트와 호른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박슬기는 애슈턴 버전 안무의 특징을 묻는 질문에 “‘뽀르 드 브라(Port de bras·팔의 움직임)’가 크지 않고, 펼치는 라인보다 둥근 곡선의 움직임이 많다”고 답했습니다. “밀고 나아가는 동작을 발끝으로 하는 게 발레의 기본인데 이번 작품에선 발바닥으로 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동작들이 무용수들에게는 아주 까다롭지만, 관객이 보기에는 자연스럽고 편하게 보인다”며 “무엇보다 드라마와 음악에 잘 맞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립발레단 15년 차인 박슬기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입단 이래 몸무게가 가장 많이 빠졌다”고 했습니다. 이날의 퍼포먼스는 출연진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짐작게 합니다. 처음 해보는 생소한 작품인데도 박슬기를 비롯한 국립발레단원들은 마치 제 옷을 입은 듯했습니다. 무대의 동작과 연기는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라마와 음악에 녹아들었습니다. 원작 코믹 발레의 희극적인 재미를 만끽하게 했습니다. 애슈턴 버전이 ‘고집쟁이 딸’의 여러 버전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완성도 높은 공연이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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