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은희경은 1995년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인생이 180도 뒤집힐 거란 생각과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반년이 지난 여름 무렵까지 소설 청탁 하나 없자 신인 작가는 애가 탔다. '이제 겨울이 오고 또 새로운 신춘문예 당선자가 나올 텐데, 그러면 나는 영영 기회가 없다.' 절박한 마음에 산 속 절에 틀어박혀 첫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새의 선물>. 이 책은 27년 만에 최근 100쇄를 찍었다. "뛰어난 성장소설이자 세태소설"이라는 호평 속에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첫 책이 이토록 사랑받는 기분은 어떨까. 은 작가는 "이 책은 제게 멀고도 환한 빛이자 길고도 희미한 그림자"라고 했다. 30일 열린 <새의 선물> 100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다. "이 책 덕분에 작가 생활을 좀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항상 제 대표작을 첫 책으로 꼽을 때 '나는 첫 책보다 잘 쓸 수 없는 작가인가' 좌절을 느끼곤 했어요. 발 밑에 동그라미로 경계선이 그려진, 한계가 지어진 느낌이기도 했어요."
<새의 선물>은 12살 화자 진희의 시선으로 가족과 이웃들을 관찰하는 성장소설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삶의 진실을 폭로한다. 은 작가는 이 소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문단의 신데렐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1995년 출간 이후 이번 개정판을 내면서 처음으로 <새의 선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과거 2판 개정판을 냈지만 내용은 고치지 않았다. 은 작가는 "이야기의 뼈대는 바꾼 게 없지만 '앉은뱅이 책상' 등 1990년대에 무심하게 썼던 장애나 여성에 대한 비하를 담은 단어는 바꿨다"며 "개정 작업을 통해 '와, 그때는 이런 말을 함부로 했구나. 하지만 사회가 바뀌어 이런 말을 내가 고치게 돼 다행이다' 했다"고 설명했다.
"<새의 선물> 개정판은 27년 전 나와 지금의 내가 공동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제 이 책은 누구에게도 선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소설을 쓸 당시에 그를 글 쓰게 만든 건 세상의 부조리였다. 그는 "이 소설은 1990년대에 쓰여진 1960년대의 이야기"라며 "90년대 당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불편함을 많이 느꼈고 '사람들의 현재가 어디서부터 통제를 받고 왜곡되기 시작했을까' 고민하다 보니 그 지점으로 돌아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부분에서는 여성 문제를, 어떤 부분에서는 계급적 얘기, 또 당시 군사독재가 일상생활에 어떻게 들어와있는지도 얘기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뒤 약 30년간 많은 것들이 변했다. 작가도, 독자도, 시대도 변했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개정 작업 중에도 되새겼던 문학의 가치다. 은 작가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고유하게 지키며 살 수 있는 권리 등은 지금도 계속해 질문해야 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며 "문학은 지금도, 앞으로도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까지 쓴 책 15권인데, 한 권도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다시 읽히고 있다는 건 저의 은밀한 자랑"이라며 "내가 그간 소설을 통해 던졌던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게 작가로서 큰 힘"이라고 했다.
27년 전이나 지금이나 은희경 작가를 말할 때 한결같이 따라붙는 표현은 '젊은 작가'라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낡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수식어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은 작가는 "저는 스스로를 '현재의 작가'라고 생각한다"며 "지금 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이야기를 포착하고 쓰기 때문에 지금의 작가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고 웃었다.
그런 그가 지금 골몰하고 있는 단어는 '몸'이다. 몸에 대한 장편소설도 준비 중이다. 그는 "몸이라는 건 어떤 인간이 가진 조건이자 타인과 관계맺기를 위해 필수적 요소"라며 "동시에 세상의 평가와 왜곡, 오해의 출발점이면서 인간의 유한함을 성찰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했다. 용기에 대한 단편소설도 구상 중이다. "소설을 많이 쓰려고 해요. 지금까지도 많이 썼지만요. 중견작가가 되다 보니 젊은 작가였을 때 역량이 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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