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유럽연합(EU)이 ‘기업 공급망 실사법(A Directive on Corporate Due Diligence and Corporate Accountability)’을 공식화했다. 이 법은 2024년 발효된다.
이 법은 국제통상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최종재와 서비스를 EU 시장에 제공한다면 해당 기업은 EU에 본사를 두지 않더라도 본사와 자회사, 계열사 및 공급망에 있는 모든 기업에 대해 해당 법에 따른 인권 실사를 해야 한다. 보통은 기업이 직접 관여했을 때만 적용받았으나 이제는 공급망 전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EU에 근거를 두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그 기구 성격상 오래전부터 인권 보호 강화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러나 이들 국제기구가 제시한 지침이 강제성이 없을뿐더러 EU 회원국의 국내 법 제도가 상이해 실효성이 별로 없었다. 최근 인도 보팔의 가스 누출 사고, 나이지리아의 나이저강 삼각주 기름 유출 사고, 방글라데시의 라나플라자 붕괴 사고 등 다국적 기업이 연관된 중대 사고가 발생하면서 EU 내에서 자성의 분위기가 형성됐고, 마침내 기업 윤리와 관련 입법까지 이르게 됐다.
그동안 기업들은 내부 매뉴얼을 만들어 위험관리를 해왔다. 하지만 기업 공급망 실사법은 위험관리 이상의 행동, 즉 정기적 실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EU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우리 기업도 2년 후부터는 이 법에 따라 전 세계 공급업체를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실사해야 하며,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한다.
EU뿐 아니라 미국 역시 2020년 ‘노예제 근절 기업인증법’을 상원에 발의했다. 이름에 노예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내용을 보면 그 본질에서 완성품(서비스) 업체뿐 아니라 그 공급업체도 인권을 탄압하거나 그에 방조했다면 수입금지 조치 등 엄중한 제재를 받는다. 이제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신경써야 할 업무가 ‘안 보이는 인권’까지 늘어났다.
이 법이 발효되면 상당수 공급망을 맡은 개도국들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수출 상위 30개국 중 개도국은 중국, 인도, 멕시코,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폴란드, 베트남, 태국, 브라질 및 말레이시아 등 9개국이다. 이 중 중국의 수출액은 272조달러(2020년 기준)가 넘어 주로 중국과 관련한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법에서 말하는 인권 보호 위반의 기준은 현지 법규다. 이 때문에 개도국-선진국 간 인권 보호의 온도 차가 상이하므로 앞으로 이 법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공급망의 기업 윤리가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도 내부 매뉴얼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여러 윤리 기준을 도입하는 추세지만 최종재와 서비스 제공자로서 공급망 관리를 까다롭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글로벌 기업 윤리의 압력에 취약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중소기업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생산시설을 개도국으로 이전했다. 중소기업은 실사까지 챙길 역량이 없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기업 실사와 관련한 사항들에 대해 분명한 법적 지침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기업 공급망 실사법이나 노예제 근절 기업인증법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말 ‘인권정책기본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인권법과 관련해서도 청와대 반대 청원이 나오는 등 아직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기업을 비롯한 사회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기업 실사와 인권이라는 중요한 키워드가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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