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로 직원이 덜 받은 금액을 (기업이) 토해내야 할 경우까지 생기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대기업 관계자)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 기준만으로 직원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이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줄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노사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 임금피크제 도입 사업장은 7만6507곳(지난해 6월 기준)으로 정년제를 운영하는 34만7433곳의 22%에 달한다.
술렁이는 기업들
기업들은 이번 대법원 선고가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부에선 “어느 특정 기관의 사례여서 산업계 전체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소송 가능성이 커진 점을 우려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오늘 하루종일 회사가 술렁였다”며 “고령 근로자들은 젊은 근로자와 달리 퇴사가 얼마 남지 않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는 직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기업 부담을 가중하고 고용 불안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고 논평했다.
법조계도 관련 소송 가능성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임금피크제 사건에서 근로자 측을 대리한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 소식을 들은 근로자들로부터 추가 소송이 가능한지 문의가 많이 왔다”고 전했다. 김용문 법무법인 덴톤스리 변호사는 “임금 소멸시효는 3년이기 때문에 퇴직자들도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커졌다”며 “임금피크제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시니어들이 모여 노조를 설립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근로자들의 후속 소송 급증은 불보듯 뻔하다”며 “도입을 완료한 기업들도 자사의 임금피크제가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소송에 대한 대응 준비를 마쳐놔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이번 판결을 임금피크제 철폐 운동으로 이어가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관계자는 “대법원의 판단을 환영하며 노조도 임금피크제 폐지 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신규 채용도 영향”
국내 기업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적지 않다. 고용노동부 고용노동통계에 따르면 정년제 도입 사업장의 22%가 임금피크제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연봉 부담이 높은 대기업 사업장이 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이상의 파급효과가 있을 수 있다.실제 임금이 높은 금융·보험업 분야 사업장 3만1533개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2만1187개로 67.2%에 달한다.
특히 시중은행보다 국책은행이 이번 판결의 영향을 더 받을 수 있다.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말 전 직원 대비 임금피크제 적용자 비율은 국민은행이 2.3%, 우리은행 2.1%, 신한·하나은행 0.1%로 높지 않았다. 반면 산업은행은 8.9%, 기업은행 7.1%, 수출입은행은 3.3%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고령자고용촉진법에서 정년 연장의 대안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하도록 사용자에게 의무를 부여하면서 임금피크제 도입이 확대돼 왔는데, 대법원이 같은 법을 근거로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판단한 점은 상당히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이 신규채용 감소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인터넷은행들의 공습에 맞서 전통 은행들이 빠르게 디지털 전환에 나서고 있는데 임금피크제가 흔들리면서 ‘은행의 고령화’가 이어진다면 대응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며 “신규 채용의 문도 더욱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곽용희/김형규/이인혁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