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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윤석열의 연금개혁, 폴 마틴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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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이미지는 언제나 총천연색이지만, 1990년대의 분위기는 잿빛이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높은 실업률에 막대한 재정적자까지…. 캐나다 경제는 암울했고,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건 연금이었다. 1992년 맥클린이라는 잡지에는 ‘연금은 안전한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20세부터 개인 저축을 시작했다는 24세 청년은 “우리가 은퇴할 때 캐나다연금(CPP)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세기말적 기사는 1990년대 초반 캐나다의 신문과 잡지, 방송을 도배했고 세대 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1965년 시작된 캐나다의 국민연금 CPP는 노인 빈곤율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나자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불과 20년 후에는 보험료를 대폭 올리지 않으면 은퇴자들에게 연금을 지급하지 못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예상보다 빠른 인구 고령화에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다.

더 큰 비극은 국민이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점이었다. 연방정부와 10개 주(州) 정부는 정치적으로 분열돼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정치인 중 누구도 연금개혁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역 상공회의소, 계리사연합회 등 민간의 보고서들만 ‘재앙’을 경고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국운(國運)이 따른 것일까. 그즈음 폴 마틴이라는 이름의 재무장관이 등장했다. 그가 소속된 자유당은 1993년 총선에서 압승했고 장 크레티앵 신임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마틴 하원의원을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마틴 장관은 재정적자가 심각하던 캐나다의 국가부채 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70%에서 50%로 낮췄다. 복지 혜택이 줄고 경기가 위축되면서 국민들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캐나다의 국가 신용등급이 회복되면서 장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마틴 장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5년 재앙에 가까운 연금 재정추계 결과가 나오자 “더 이상 미래 세대에 문제 해결을 미루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CPP 개혁에 착수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로부터 의견을 취합한 뒤 10개 주 정부 재무장관들과 협의체를 구성했다.

보험료와 소득대체율은 정치적으로 극히 민감한 주제였다. 주마다 이해관계가 갈렸다. ‘소득대체율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부터 ‘CPP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조정은 신의 영역이었다. 마틴 장관은 각 주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지속가능한 연금을 만든다’는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다.

합의는 재미있게도 서울에서 이뤄졌다. 1997년 1월 크레티앵 총리는 400명의 기업인과 연방정부 및 주정부 관료들을 이끌고 한국, 필리핀, 태국을 방문했다. 이른바 ‘팀 캐나다’의 아시아 무역 사절단이었다. 마틴 장관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 여행이 합의를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크레티앵 총리도 각 주지사를 설득하는 일을 도왔다. 서울의 한 호텔은 캐나다 정치인들의 신경전으로 긴장감이 흘렀다.

그렇게 극적으로 합의안이 도출됐다. 같은 해 2월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서명이 이뤄졌다. 1996년 6%였던 보험료를 2003년까지 9.9%로 올리고, 부과 방식(pay-as-you-go)에서 적립 방식으로 변경해 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골자였다.

특히 마틴 장관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면 정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기금 운용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연기금 운용 회사 ‘캐나다연금 투자위원회(CPPIB)’는 그렇게 탄생했다.

마틴 장관은 ‘위험 대비 수익 극대화’를 CPPIB의 유일한 법적 책무로 명시했다. ‘캐나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등의 문구를 제외해 정치 개입의 여지를 원천 차단했다. 위원회는 각 주가 추천한 전문가로 구성했고, 위원회가 시장에서 최고경영자(CEO)와 최고투자책임자(CIO)를 고용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지방정부 채권만 살 수 있었던 CPP 기금은 이후 전 세계 투자 자산에 분산 투자됐다.

마틴 장관은 몇 년 후 “거대한 연기금을 컨트롤하는 유혹을 뿌리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2003년 캐나다 총리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동·교육개혁과 함께 연금개혁을 강조했다. 다음달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기가 떨어지는 연금개혁 의지를 확인한 윤 대통령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이전 정권도 모두 입으로는 연금개혁을 외쳤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다. 인기영합주의, 지역이기주의, 부처이기주의를 이겨내지 못해서다.

국민연금은 2055년 소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가 빨라지면 소진 시기는 더 앞당겨질 것이다.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 인력은 세계 정상급이지만, 국민연금은 취약한 지배구조 탓에 정치적 독립성을 의심받고 있다. 게다가 공무원연금, 군인연금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윤 대통령은 이 모든 난제를 풀고 한국의 폴 마틴이 될 수 있을까. 무운(武運)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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