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낙태권
청바지 브랜드로 유명한 리바이스트라우스(리바이스)는 지난 4일 성명을 내고 “낙태가 금지된 주에 거주하는 여성 직원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다른 주로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매체 폴리티코가 “연방대법원이 임신 6개월까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으려고 한다”고 보도한 데 대한 반응이다.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이르면 오는 6월 말 나올 예정이다.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이후 낙태권이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서서 별도의 비판 성명을 냈다. 최근엔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도 미 의회에 출석해 “여성에게서 낙태권을 박탈하는 것은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기업들은 여성 직원의 낙태 시술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낙태복지안을 마련해 시행해왔다. 소비자와 투자자의 낙태권 보장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리바이스에 앞서 1~2년 전부터 애플, 아마존, 세일즈포스 등이 잇따라 “여성 직원의 낙태 시술을 위한 원정 경비를 지원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기업들이 (복지와는 별개로) 낙태권 폐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면서 기업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리바이스는 낙태 복지 발표와 함께 “낙태 접근권을 제한하거나 낙태를 범죄화하는 것은 미국 노동시장과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성별·인종적 형평성을 향한 미국의 국가적 노력도 후퇴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업 행동주의 압박 커져
FT에 따르면 리바이스처럼 강한 어조로 낙태권 폐지에 우려를 표명한 기업은 드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놓고 이른바 기업 행동주의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미 예일대 경영대학원의 한 교수는 “기업 경영진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를 꺼리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의 보복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인세 조정과 규제 철폐 등 친기업적 정책들을 놓고 공화당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대기업 중 상당수가 낙태권 이슈가 쟁점화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투자은행 씨티그룹의 최근 행보가 정치권을 의식해 낙태권 논쟁을 정면 돌파하는 것을 회피한 대표적 사례”라고 보도했다. 씨티그룹은 올해 3월 낙태 원정 비용을 지원하는 다른 기업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그러나 텍사스주의 한 공화당 의원이 “씨티그룹이 지방채권을 인수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압박하자 입장을 바꿨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최고경영자(CEO)는 4월 연례 주주총회에서 “낙태 원정 경비 혜택은 그저 직원 건강을 위한 복지 차원”이라며 “낙태권 논란에 대한 회사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말했다.
기업 행동주의를 요구하는 압박 수위는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한 컨설팅업체 조사에 따르면 미 기업에 직원들의 낙태권 보장 관련 주주제안을 하는 사례가 지난 3년 사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R기업 레빅의 리처드 레빅 회장은 “점점 더 많은 소비자와 주주들이 기업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시민사회도 낙태권과 관련한 기업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는 분위기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영 컨설팅 기업 BSR의 로라 기트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낙태권 제한을 지지한다는 의미”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낙태권 지지 시민단체 관계자는 “낙태에 대한 접근권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안정성과 경제적 정의의 문제”라며 “이 같은 경제적 관점을 통해 기업들을 낙태권 논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미 미들베리칼리지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남녀 직원의 수입이 비슷했지만, 출산 이후 여성의 수입은 약 33%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