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
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
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대부터 1900년께까지 꾸준히 감소한다.
이와 함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대량은 감소하고 토지생산성은 크게 떨어졌다. 18세기 중반 두락당 15~20두였던 지대량은 19세기 전반 10두 안팎으로 하락한 뒤 185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다시 두락당 5두 정도까지 위축됐다. 정치 불안과 행정체제 붕괴, 수리시설 악화가 겹치면서 농업생산성 위기의 시대가 온 것이다.
농업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은 산업혁명 및 기술혁명을 통한 근본적인 생산방식 변화라는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위스의 경제사가 폴 베어록이 19세기 유럽의 농업생산성을 분석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는 1800년부터 1912년까지 유럽과 미국 등 서구 27개국의 농업생산 총량을 농부 1인당 100만 칼로리 단위로 추산했다.
그 결과 1800년 시점에선 미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평균은 600만 칼로리였고 독일과 프랑스 650만 칼로리, 벨기에 700만 칼로리, 이탈리아 500만 칼로리, 러시아 560만 칼로리, 스위스 580만 칼로리 식으로 유럽 내에선 국가별 차이가 크지 않았다. 미국(1540만 칼로리)과 영국(1320만 칼로리)만 효율성이 두드러졌을 뿐이다.
하지만 1848~1852년이 되면 산업화된 국가와 비산업화 국가 간 농업생산량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영국은 1730만 칼로리로 부쩍 늘었고 프랑스(1100만 칼로리), 독일(1040만 칼로리), 벨기에(950만 칼로리)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반면 산업화에 뒤처진 이탈리아(510만 칼로리), 러시아(590만 칼로리)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1878~1882년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농부 1인당 1370만~1870만 칼로리의 농산물을 소출한 반면 이탈리아(540만 칼로리)와 러시아(600만 칼로리)는 80년 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효율성을 보였다. 이런 상황은 20세기 초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유럽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 근본적인 사회 생산체계에 큰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농업생산성을 증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친경의례는 국가 최고 지도자가 솔선수범을 보이며 경제활동의 근간을 진작한다는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시행된 적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실상도 찬사일변도로 평하기 힘든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친경이 오랜 우여곡절 끝에 실천에 옮겨진 얼마 뒤에 민간의 농업생산량이 곤두박질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순한 ‘솔선수범’만으론 생산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NIE 포인트
1. 본문에서 친경의식이 부활한 이유를 찾아보자.2. 산업화와 농업생산성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토론해보자.
3. 산업화 이후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된 이유를 조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