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김범석 쿠팡 의장 등 외국 국적 기업인도 ‘총수(동일인)’로 지정해 사익편취 규제를 적용하는 법령 개정을 추진한다. 또 총수의 특수관계인 범위는 기존 혈족 6촌에서 4촌 이내로 줄이되, 사익편취 규제는 특수관계인 외 대상으로 오히려 일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공정위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정거래법제 개편 방침을 빌미로 규제 강화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수 지정제도 12년 만에 바꾼다는데…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공정위의 ‘총수 지정 제도 현실화 방안’을 1차 국정과제에 포함한 것으로 6일 확인됐다. 공정위가 제시한 제도 개선안은 외국인 총수 지정 근거 마련, 총수의 특수관계인 범위 축소 등이 핵심이다. 윤 당선인은 친족 범위의 합리적 조정 등 공정거래법상 특수관계인 제도 운영 개선을 공약했다. 현행 특수관계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기업경영에 부담을 준다는 측면에서다. 공정위는 올해 하반기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을 거쳐 내년 5월 동일인을 지정할 때 새로운 제도를 적용할 방침이다.이 경우 내년부터 미국 국적인 김범석 의장에 대한 총수 지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 의장이 총수로 지정되면 쿠팡 미국법인의 거래내역을 국내에 공시해야 하고, 김 의장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현황 등을 공정위에 보고해야 한다. 공정위는 외국 국적을 이용한 총수 지정 회피 사례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경북대 산학협력단으로부터 제출받은 ‘동일인 제도개선 연구용역’ 보고서는 총수로 지정하는 외국인을 ‘한국에서 기업집단을 형성하고 국내 경제력 집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한국계 외국 국적 보유 자연인’으로 규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집단은 총수의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기업과 주식 현황 등을 모두 신고해야 한다. 다만 공정위는 총수의 특수관계인 범위를 혈족 6촌·인척 4촌 이내에서 혈족 4촌·인척 3촌 이내로 축소하기로 했다. 2009년 혈족 7·8촌을 규제 대상에서 제외한 이후 첫 특수관계인 범위 축소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 특수관계인에 해당하는 친인척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특수관계인이 기업의 자료 제출 요청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었다. 신고의무를 위반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는 형벌 규정도 과도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그러나 공정위는 특수관계인 외에도 사익편취 가능성이 있는 모든 대상에게 필요할 경우 주식보유 현황 등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특수관계인 범위가 축소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사익편취 규제는 강화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혜국대우 위반·기업 부담 논란
공정위의 총수지정제도 개편안은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할 경우 통상마찰을 빚을 우려가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최혜국대우 조항에 위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람코가 최대주주인 에쓰오일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아닌, 에쓰오일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로 판단될 수 있다. 동일인 제도 관련 논의에 참여한 관계자는 “연구 결과 외국인을 총수로 지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게 결론”이라며 “다만 미국과의 통상 마찰 이슈는 풀어야 할 과제”라고 설명했다.경제계는 기업의 경영활동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구시대적인 동일인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동일인 제도가 개발연대 소수 기업을 집중 지원·육성하는 과정에서 특정 개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한국식 규제였다는 점에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현행 법령 가운데 특수관계인 관련 규정이 있는 법령은 168개, 조문은 717개에 달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총수지정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낡은 규정”이라며 “자료 수집 권한이 없는 민간에 자료제출 의무를 부과하고, 누락 시 엄벌하는 제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현/이지훈 기자 alp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