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지키면서도 금융 안정과 물가를 잡을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31일 퇴임식에서 8년 임기를 마치는 소회를 밝혔다. 43년간 ‘한은맨’으로 일한 이 총재는 “가계부채 누증 등 금융 불균형이 심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인플레이션이 다시 나타났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지난 8년간 기존 경험이나 지식과는 많이 다른, 매우 익숙지 않은 새로운 거시경제환경에서 통화정책을 운용했다”며 “금리 결정의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 총재는 43년간 한은에 몸담은 정통 한은맨이다. 1977년 한은 입사 후 2012년 4월 부총재로 퇴직해 2년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고문과 연세대 특임교수를 지낸 뒤 박근혜 정부에서 한은 총재에 임명됐고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한은 총재 연임은 역대 세 번째이자 1970년대 김성환 총재(1970∼1978년) 이후 처음이다.
이 총재는 부총재보 시절인 2008~2009년 두각을 나타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8년 9월 한국 금리가 치솟고 단기자금 조달 시장 경색이 진행됐을 때다. 이 총재는 당시 한은 금융시장국을 지휘해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증권사 등에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자금시장 경색을 푸는 데 기여했다.
2014년 4월 총재 부임 후 지난 2월까지 총 76회의 기준금리 결정 회의를 주재했다. 전문가들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이임사에서 쓴 것처럼 ‘실기(失期)’ 사례가 드물었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작년 8월과 11월, 올 1월에 걸친 세 차례 금리 인상은 특히 호평을 받았다.
이 총재는 지난 3월 14~15일 열린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금리 인상 결정은 인기 없는 결정”이라며 “작년 8월 인상 시점에는 미국 중앙은행(Fed)도 인상을 안 하고 코로나19 해결도 멀었는데 왜 금리를 인상하느냐는 비판 여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경기 전망도 괜찮고 물가도 오를 거란 판단 아래 어려운 결정을 했다”며 “그때 정상화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면 지금 따라가기 힘들어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을 향한 외부의 기대와 요구가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봤다.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으로 설정된 중앙은행 정책 목표에 ‘고용 안정’을 추가하자는 논의가 대표적이다. 이 총재는 “여러 사회 문제 해결에 경제적 처방을 동원하고자 하면 할수록 중앙은행에 대한 기대와 의존은 계속 늘어날 것”이라며 “중앙은행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앞으로 역할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깊이 있는 연구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으로는 중앙은행을 향한 요구가 늘었지만, 정책 수단이 기준금리밖에 없다는 점을 꼽았다.
임기 중 미진한 점도 없지 않다. 한은 조직문화 개혁이 미완에 그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컨설팅업체 맥킨지에 의뢰한 한은의 조직 건강도는 100점 만점에 38점에 그쳤다. ‘수재의 무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지 않는 조직’ 등으로 통하는 한은의 보수적 조직문화를 바꾸는 숙제는 차기 총재에게 넘어갔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정책 실패 등 정부의 주요 정책 현안에 한은이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은이 수많은 보고서를 내지만 이런 사안에 대한 정책 보고서는 거의 없었다.
이 총재는 퇴임 후 당분간 휴식을 취할 계획이다. 그는 “컴퓨터에서 로그아웃하는 것처럼 당분간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비우고 싶은 마음”이라며 “아내가 탁구를 배우는데 같이 탁구도 치고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나오는 맛집도 찾아가면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