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엔=980원대’로 추락
2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엔 환율은 전날보다 7원20전 내린 100엔당 989원59전에 마감했다. 2018년 12월 5일(985원45전) 후 최저치다. 원·엔 환율은 올 들어서만 42원80전이나 빠졌다. 이날 엔·달러 환율은 내림세를 나타내며 장중 달러당 123엔에 거래됐다. 하지만 전날 장중에는 달러당 125엔대까지 치솟아 2015년 8월 후 최고치를 기록했다.엔화는 그동안 달러, 금과 함께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꼽혔다. 일본의 넉넉한 외화자산과 탄탄한 경제 기초체력 덕분이다. 경상수지 흑자폭이 불어나면서 올해 1월 말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3859억달러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왕성한 ‘엔 캐리 트레이드’도 엔화의 안전성을 높이는 배경이 됐다.
일본의 저금리를 못 견디고 고수익(고위험)을 좇아 엔화를 빌려 해외 자산에 투자한 일본 가계·기업이 상당했다. 해외로 흩어진 일본인 자금은 금융위기 등이 불거지면 해외 자산을 처분하고 엔화로 환전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엔화 가치도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마이너스 금리 고집하는 일본은행
하지만 최근 들어 엔화의 안전자산 입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을 장기간 이어나갈 뜻을 시사한 것 등이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행은 지난 17~18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책금리를 연 -0.1%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행은 소비자물가가 물가안정 목표치(2%)를 안정적으로 웃돌 때까지 완화적 통화정책을 이어나갈 방침을 밝혔다. 지난달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9% 수준인 점을 감안할 때 중장기적으로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이런 통화정책은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인플레 대응 차원에서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과 상반된 움직임이다.
경제 펀더멘털도 예전만 못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코로나19 직후 일본 경제 회복 속도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더뎠다. 2019년 국내총생산(GDP)을 100이라고 하면 일본의 올해 GDP는 100으로 전망됐다. 3년 만에 겨우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올해 GDP 기준으로 미국(106.1) 캐나다(103.2) 독일(101.7) 프랑스(101.6)는 물론 한국(106.2)이 100을 웃돈 것과 비교해 일본의 회복 속도는 느린 편이다.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경상수지도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면서 경상수지는 올해 2월과 3월 두 달 연속 적자를 냈다.
‘엔저’에 떠는 韓 수출기업
미국 등 주요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현대자동차·기아를 비롯한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일본 기업들의 수출제품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미국 소비자들이 현대차와 도요타 사이에서 고민할 때 우선 고려하는 게 가격”이라며 “한국 자동차 제조사는 차량 마진 측면에서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철강과 석유화학 등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재수 전국경제인연합회 아태협력팀장은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 국내 기업의 주력 수출제품이 일본과 상당 부분 겹친다”며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단기적으로는 해당 분야 기업들의 이익이 낮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익환/김형규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