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시작되기 전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조명이 떨어진 무대 위. 백발의 여배우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마이크를 꼭 쥔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잠깐의 실수가 나오자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데뷔한 지 65년이나 지난 대배우 김영옥이 긴장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약 3분 30초의 시간 동안 한 편의 긴 영화를 본 듯 다양한 생각과 감상이 오갔다. 삶을 노래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
JTBC 예능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뭉클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본업이 가수는 아니지만 노래하는 것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배우 및 방송인들이 모여 합창단을 꾸려가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총 2회에 걸쳐 15인 출연진들의 자기소개 무대가 펼쳐졌다. 김영옥, 나문희를 시작으로 배우 김광규, 장현성, 이종혁, 최대철, 이병준, 우현, 이서환, 윤유선, 우미화, 가수 권인하, 서이숙, 박준면, 방송인 전현무까지 각자의 개성이 깃든 곡을 선곡해 불렀다.
그간 다양한 음악 예능이 시도되어 왔지만, '뜨거운 씽어즈'가 특히 큰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로는 진정성이 꼽힌다. 자기소개 무대는 충격을 안겼다. 출연진들은 기술적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낼 줄 알았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선곡한 김영옥은 "얼마 안 남은 나의 미래, 주위에 먼저 간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노래"라면서 "슬픔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위로하는 음악 같다"고 했다. 떠나간 이는 바람이 되어 이곳저곳에 손길을 더하고 있으니 울지 말라는 가사는 실제로 남겨진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듯했다.
2004년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로 데뷔해 단역을 전전하며 오랜 무명을 겪은 배우 이서환은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준 아내를 떠올리며 정인, 윤종신의 듀엣곡 '오르막길'을 불렀다. 그는 "이제 밥벌이할 수 있는 50대가 됐다"면서 "기억하고 싶지는 않은 과거이지만 그때의 나를 생각나게 해주는 노래"라고 털어놨다. 그러고는 한 소절, 한 소절 진심을 담아 뱉어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에 제각각의 사연과 스타일이 담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참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위주로 획일화된 최근의 음악 시장에서 살짝 벗어나 비로소 음악적 다양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한 순기능 덕분일 테다.
돈 되는 사업에 투자가 몰리고, 이를 통한 수익이 다시 소비가 높은 장르에 재투자되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음악 시장 내 다양성 부족 문제가 수반되고 있다. 어느덧 대중가요는 젊은 층만이 향유하는 문화라는 인식도 자리 잡았다.
음악을 다루는 방송가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년에 걸쳐 아이돌, 트로트 가수 등을 선발하는 경쟁 위주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쏟아내며 시청자들의 피로도를 높였다.
그 가운데 다양성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키는 포맷이 주목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 가수들을 섭외한 '싱어게인', 밴드 결성 프로젝트 '슈퍼밴드' 등이다. 다양성이 마치 성공 공식이 된 듯, '뜨거운 씽어즈' 역시 합창이라는 소재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음악감독 또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자주 나왔던 심사위원들이 아닌, 뮤지컬계에서 최정상으로 꼽히는 김문정과 독보적인 음악색을 자랑하는 잔나비 최정훈으로 선정하는 등 차별점을 뒀다.
경쟁이 아닌 화합에 초점을 맞춘 것 또한 강점으로 꼽힌다. 참가자들에 대한 평가와 탈락,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 등을 카메라에 담으며 자극적인 맛을 추구했던 기존 방송의 흐름과는 결이 다르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직접 "탈락이 없다. 너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합창이라는 소재에 걸맞게 출연진들이 화합해 완벽한 하나의 합창단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그려질 예정이다. 비록 '순한 맛'이 폭발적인 시청률을 안겨주지는 못할지언정 음악을 쉽게 예능 소재로 소비하는 방송가에 다양성에 대한 화두는 던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천편일률적인 경쟁 위주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나날이 시청률이 하락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는 음악을 매개로 한 진정성 있는 시도들이 그 자체로서 순기능을 해낼 수 있길 기대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