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86)의 그림은 단순하다. 단색의 붓질 혹은 점의 형상이 곧 작품이다. 그래서 어렵다. 여백에 찍힌 점 하나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그의 산문집 《양의의 표현》(현대문학)이 출간됐다. 지난해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것을 우리말로 옮겼다.
서양 미술은 오랫동안 캔버스에 공백을 남기는 걸 꺼렸다. 하지만 이우환은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여백도 그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뛰어난 산수화나 세잔, 모네의 일부 만년의 화면에는 근사한 여백이 숨 쉬고 있다. 화면과 공백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그 진동은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여백은 때론 사람을 아득한 차원으로 해방시킨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작품은 그리는 것과 그리지 않은 곳,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은 곳과의 대응에 의해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를 ‘여백 현상’이란 말로 설명한다. “고요한 연못에 조약돌을 던지면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언저리에 파문이 퍼지는 것”처럼 그의 그림은 공백을 자극하고, 거기에 강렬한 반향 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집에 있으면 그림을 그릴 때 외에는 대체로 책상 앞에 앉아서 생각을 한다”는 그는 이 책에서 예술은 물론 삶과 죽음, 인공지능(AI), 코로나바이러스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드러내며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哲人)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고 했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결코 완전함을 과시하지 않는다”며 AI가 그린 그림의 한계를 지적한다.
1936년 경남 함안 태생인 이우환은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2002년 《여백의 예술》, 2009년 《시간의 여울》에 이어 세 번째인 이번 산문집에서도 그의 평론가적, 문학가적 면모가 드러난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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