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랴빈보다) 생전에 더 유명했던 사람은 없었고, 사후에 더 빨리 무시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의 전기를 집필한 미국 작가 포비온 바우워스가 한 말이다. 과장이 섞인 촌평이자만 작곡가의 생애와 그의 음악이 맞은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스크랴빈은 20세기 초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러시아 정취가 담긴 매력적이고 짧은 쇼팽 스타일의 소품을 썼지만, 나중에는 전통적인 화성이나 조성 체계에서 벗어난 신비주의 작품들로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생전에는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라흐마니노프보다 더 이름을 날렸지만, 사후에는 별종 취급을 받으며 주류 음악계로부터 외면받았다. 그의 작품은 영국에서 ‘사악한 음악’이란 비판까지 받으며 연주 프로그램에서 삭제되는 수모도 겪었다.
전위적인 음악이 부상한 1960년대 후반 이후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사정은 나아졌다. 독특한 구성과 신비한 색채에 매료돼 그의 음악을 연구하고 연주 목록에 올리는 후대 음악가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연주 레퍼토리가 확장된 요즘도 초기 피아노곡들을 제외한 작품들을 연주회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국내에서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는 스크랴빈의 교향곡이 잇달아 연주 무대에 올라 음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오케스트라 심포니 송이 오는 2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교향곡 1번을 국내 초연하고, 부천필하모닉과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이 교향곡 4번 ‘법열의 시'와 교향곡 2번을 다음 달 2일과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각각 연주한다. 송주호 음악평론가는 “탐구심이 강한 지휘자들이 작곡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평소 프로그램에 올리기 힘든 곡들에 도전한다“며 ”음악사의 돌연변이 같은 존재인 스크랴빈의 음악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스크랴빈은 다섯 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이중 단악장으로 이뤄진 4번과 5번은 교향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1900년과 1901년에 완성된 1번과 2번은 당대 주류인 후기 낭만주의 스타일로 쓰인 초기 작품이지만 음악적 짜임새가 모호해지는 등 작곡가의 혁신적인 시도가 엿보이는 곡들이다.
1번 ‘예술적인 시’는 2명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 대 편성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6악장의 대곡이다. 연주 시간이 50분에 달하는 대곡으로 마지막 악장에서 예술의 숭고함을 찬양하는 성악곡이 나온다. 가사는 스크랴빈이 직접 썼다. 지휘자 함신익이 이끄는 심포니 송은 국내에서 공연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이 곡을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테너 이명현, 국립합창단과 함께 연주한다.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 노트’를 쓴 박희정 지휘자 겸 작곡가는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시종일관 모든 악장을 통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며 “교향곡의 결말인 6악장에는 예술을 통해 인간 계몽을 꿈꿨던 작곡가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심포니 송은 이 곡에 앞서 모차르트의 저녁 미사 전례곡 ‘구도자를 위한 엄숙한 저녁기도’를 연주한다.
2번은 ‘초인적인 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니체 철학의 초인사상이 작품 배경을 이루고 있는 낭만주의 작품이다. 작곡 당시 초인 사상에 빠져 있던 스크랴빈은 음악을 통해 초인을 체현할 수 있으며 그 음악을 만드는 자신을 초인으로 생각했다.
총 5악장으로 구성된 2번은 작품 전체 구조가 서주-제 1주제-제2주제-발전부-재현부의 소나타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번 연주회에서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을 객원 지휘하는 이승원 지휘자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리스트와 바그너의 영향이 엿보인다”며 “스케일이 웅장하고 작품성이 뛰어나 후기 낭만주의 명곡으로 꼽을 만하다”고 말했디.
군포 프라임필하모닉은 스크랴빈과 함께 프로코피예프 ‘히브리 주제에 의한 서곡’, 버르토크 ‘비올라 협주곡’(협연 김세준) 등 20세기 전반기에 쓰여진 작품을 들려준다.
1907년 초연된 ‘법열의 시’는 창조적인 영혼의 희열을 묘사한 20분 남짓의 단악장 곡이다. 스크랴빈의 관현악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대표작으로 신비주의적인 색채와 관능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작곡가가 신비주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창안한 신비화음(기본형:도-파#-시b-미-라-레)이 본격적으로 쓰였다. 유형종 음악평론가는 “영혼과 육체는 구분될 수 없다는 작곡가의 사상을 음악에 반영했다“ 며 ”희열로 향하는 길을 남성적 애욕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부천필하모닉은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을 스크랴빈을 비롯해 올해 ‘기념의 해‘를 맞은 작곡가의 작품들로 구성했다. ’법열의 시‘에 앞서 탄생 200주년을 맞은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탄생 150주년인 레이프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들려준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