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예전만큼 대기 줄이 길지 않은 것 같아요… 종종 ‘퇴근런’도 가능하더라고요.”
샤넬 가방을 구매하려는 직장인 강은서 씨(36)는 최근 들어 오후 5시에 퇴근한 후 근처 백화점에서 ‘퇴근런’을 한다. 퇴근런이란 퇴근길에 백화점을 들러 줄을 서는 것을 뜻하는 은어다. 몇 달 전만 해도 연차를 내고 새벽 일찍 ‘오픈런’을 해야 매장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퇴근 시간대에 대기 등록을 해도 매장 문을 닫기 전까지 입장할 수 있을 정도로 대기 행렬이 줄었다”고 강 씨는 귀띔했다.
이처럼 샤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지나친 가격 인상에 소비자들이 가격 저항에 나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오픈런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브랜드 이미지도 추락했다는 분석이다. 리셀(되팔기) 시장에서 수백만원씩 웃돈이 붙던 명품의 가격이 정가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서던 줄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주 서울 지역 백화점 내 샤넬 매장은 물론이고 강남권 플래그십스토어 매장 대부분에서 퇴근런이 가능했다. 오후 6~7시쯤 퇴근 시간에 대기 등록을 해도 매장 폐점시간인 오후 8시~8시30분까지 넉넉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는 것.
지난주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에서 ‘클래식 플랩백’을 구매한 함모 씨(38)는 “저녁 6시반쯤 대기 등록을 했는데 한 시간도 채 안돼 매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며 “매장도 한산했고 재고가 넉넉했다. 두세달 전만 해도 매일 매장을 들러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던 클래식백이 많이 남아있었을 정도”라고 전했다.
리셀 시장에서 샤넬 가방에 붙던 프리미엄(웃돈)이 크게 줄면서 리셀업자들 수요가 줄어든 여파로 보인다. 한정판 거래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샤넬의 대표 제품 ‘클래식 미디움 플랩백’의 리셀 프리미엄이 사라졌다. 최근 리셀가는 정가 밑으로 떨어졌다.
클래식백 미디움 사이즈의 새상품 리셀가는 전날(21일) 기준 1138만으로 정가(1180만원)보다 50만원가량 낮다. 연초만 해도 리셀가는 1400만원에 달했지만 최근 들어 프리미엄이 300만원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리셀업자들이 매장 앞에서 어렵게 줄을 서 상품을 사도 ‘수고 비용’은커녕 물건을 산 비용도 제대로 건질 수 없어 손해를 보는 상황이다.
일반 소비자 구매 수요도 줄었다. 큰 돈을 쓰면서도 오픈런에 불친절한 서비스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피로감을 키운 탓이다. 전날 밤부터 매장 앞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깔고 기다리는 ‘노숙런’, 에스컬레이터 역주행을 벌이는 ‘좀비런’ 등 2년여 동안 이어진 오픈런 열풍에 VIP(우수 고객)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실추된 여파도 있다.
국내 백화점 두 곳에 VIP 고객으로 등록돼 있는 박재숙 씨(55)는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백이라는 인식이 강해져 기존에 갖고 있던 샤넬 가방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며 “주변 VIP들의 관심은 요란하게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명품 브랜드로 옮겨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샤넬 가격이 정점을 찍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국내 기준으로 샤넬 클래식 플랩백 미디엄 사이즈는 2012년 611만원에서 현재 1180만원으로 10년 사이 두 배 가까이(93%) 올랐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가 14.7% 올랐으니 물가보다 6배 이상 높은 상승률이다. 횟수로 따져도 지난해 4번, 올해도 연초에만 두 번 가격을 인상했다.
앞으로 몇 차례 가격 조정이 더 있을 순 있지만 지금처럼 공격적으로 가격을 올릴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종식 이후 해외여행 재개 등으로 전반적 명품 지출이 줄어들 수 있어기 때문이다. 명품 판매를 좌지우지하는 중국의 성장세가 예상보다 부진해 글로벌 본사의 가격 정책도 보수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실제 2010~2014년 수요가 줄고 명품 선호 현상도 사라지면서 당시 샤넬도 주요 제품 가격을 20% 내리고 할인 판매에 나선 바 있다”며 “판매량이 줄면 콧대 높은 샤넬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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