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종합 반도체기업 인텔이 유럽에 반도체 생산과 연구개발(R&D)을 위해 800억 유로(약 110조원)를 투자하기로 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에서 밀려난 유럽이 뒤늦게 보조금 지원 등으로 기술력 확보에 나선 데 착안한 행보라는 분석이다.
겔싱어 "전세계 반도체 80%가 아시아서 생산" 우려
17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이 같은 내용의 유럽 반도체 투자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기자회견에서 "인텔의 투자는 스페인에서 폴란드까지 유럽연합(EU) 전체에 걸쳐 이뤄질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더 조화롭고 탄력 있는 공급사슬(서플라이 체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그는 "이러한 투자는 세계가 반도체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인텔은 균형 있고 탄력적인 반도체 공급망의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앞선 기술을 유럽에 도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공급은 여전히 모자라 많은 산업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언급한 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80%가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된다"며 반도체 지역 편중을 우려했다.
실제로 대만 TSMC는 AMD(라이젠·라데온)와 엔비디아(지포스 RTX 20·40 시리즈), 애플(A시리즈·M시리즈) 등 주요 글로벌 업체들의 반도체를 위탁생산(파운드리)하고 있고 삼성전자도 한국, 중국 등에 대형 반도체 공장을 가동 중이다.
인텔은 옛 동독 지역인 마그데부르크에 170억 유로(약 23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 허브를 만든다. 인텔은 2023년 상반기에 공장 건립을 시작해 2027년부터 생산에 들어가 유럽 반도체 자립의 초석 다진다는 계획이다.
프랑스에는 파리 인근에 R&D센터를 설립할 예정이다. 총 1000명이 고용되는 센터에서는 인텔의 고성능컴퓨팅(HPC)과 인공지능(AI) 디자인 능력 향상에 관한 연구가 이뤄진다. 인텔은 프랑스에 파운드리 디자인센터도 설립할 예정이다.
인텔은 아일랜드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120억 유로(약 16조2000억원)를 들여 확장하고 이탈리아에도 45억 유로(약 6조2000억원) 규모의 포장 및 조립시설을 만들 구상이다. 아울러 폴란드에도 실험시설을 확충하고 바르셀로나 슈퍼컴퓨팅 센터와 공동센터를 설립한다.
EU 집행위원장 "인텔 투자 대환영"
인텔의 대규모 유럽 투자 발표에 우르줄라 폰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EU 칩스 법'(European Chips Act)에 따른 첫 번째 성과라며 반겼다.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것(인텔의 발표)이 더 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뒤따를 수 있는 선례를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로베르트 하벡 독일 경제장관 역시 "이 소식이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증진시킬 것"이라며 환영했다. 그는 새 시설이 독일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U 지도자들은 지난달 유럽이 주요 반도체 생산국이 되도록 돕고 자동차에서 스마트폰, 게임기에 이르기까지 전자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 칩에 대한 아시아 시장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칩스 법'을 발표하고 공공과 민간에서 반도체에 430억 유로(약 59조원)를 투자하기로 한 바 있다.
겔싱어 CEO는 "인텔의 투자 속도와 규모는 반도체 시설을 계획하고 있는 국가나 지역에 대한 EU 보조금에 매우 많이 의존하고 있다. 아시아에 공장을 세우는 비용과 비슷하도록 공장 건설 비용에 대한 보조금 지원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EU는 인텔의 투자를 시작으로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을 전 세계 생산량의 20%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EU 회원국들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9% 수준에 불과하다. 세계 경제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유행에서 회복되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지만 병목 현상으로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고, 유럽은 주요 공급망에서 뒤처졌다는 게 EU 지도자들의 인식이다.
앞서 겔싱어 CEO는 지난해 미국 매체 '악시오스'와의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도 "한국(삼성전자)과 대만(TSMC)에 반도체 생산을 의존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유럽 반도체 기술력…삼성전자·TSMC에 못 미쳐
현지 파운드리 업체들의 기술력 저하 문제도 있다. 유럽 내 반도체 생산시설은 10나노(nm)급 이하 첨단 공정에서 뒤처진 상황이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반도체 생산 시설은 글로벌파운드리가 독일 드레스덴에서 운영하는 '팹 1'. AMD가 2009년까지 운영했고 과거 애슬론64 등 프로세서 생산에 활용됐다. 그러나 공정 수준은 10년 전 수준인 65-22nm에 머물러 있다.인텔도 지난 2월 이스라엘 소재 반도체 생산기업인 타워 세미컨덕터를 인수하면서 이탈리아 소재 생산 시설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시설 역시 65nm 공정에 머물고 있다.
이들 시설은 이미 충분히 성숙된 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첨단 공정 대비 낮은 단가로 자동차나 산업용 반도체를 대량 생산할 수 있지만 앞으로 수요가 늘어날 자율주행차나 인공지능(AI)용 고부가가치 반도체 생산은 어려운 한계가 있다.
유럽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둘 경우, 차세대 극자외선(High-NA 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에서 보다 빠른 시간 안에 장비를 들여와 공정 가동에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 유럽이 자율주행 전기차 전환에 속도를 내는 만큼 이에 대비해 차량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을 선점해 현지 자동차 업체와의 협업을 강화하려는 인텔의 포석도 깔려있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은 이번 인텔의 대규모 투자를 계기로 "아시아에 대항한 EU의 반도체 자립을 위한 생산확대 경쟁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도체 업계는 인텔뿐 아니라 다양한 업체들의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 수많은 영역이 디지털화되면서 반도체 수요가 더욱 늘어나면서 관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규모는 작년보다 20% 성장한 1321억달러(약 161조원)로 예상된다.
TSMC는 올해 작년보다 40% 늘어난 420억달러(약 52조3000억원)를 투자할 예정이다. 미국 글로벌파운드리는 1년 전보다 155% 증가한 45억달러(약 5조6000억원), 대만의 UMC는 1년 전보다 71% 증가한 30억달러(약 3조7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도 2030년까지 반도체에 170조원을 투자할 계획으로, 미국 텍사스에 20조원 규모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의 반도체 설계 능력은 세계 최고지만 생산 등 첨단 미세공정 기술력에서는 TSMC와 삼성전자에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라며 "글로벌 시장이 원하는 파운드리 기술력을 인텔이 갖출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