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나이프 등을 보고 그 레스토랑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국가의 문화적 품격은 일상 속 디자인을 통해 드러난다. 지하철 지도는 그 나라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수준을 표상하는 지표다. 지하철 지도는 한정된 지면에 다양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담아야 하기에 사용하는 글꼴의 종류, 크기, 색상, 배치 등에 따라 복잡한 내용이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단순한 내용이 복잡해 보이기도 한다. 영국이 모범적이다. 해리 베크가 디자인한 영국 지하철 지도는 세계 최초의 지하철 지도다. 체계적인 설계와 조화로운 디자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의 지하철 지도를 처음 접했을 땐 실망스러웠다. 프라다·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들의 본고장이라는 명성에 맞게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역량도 뛰어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발생지인 영국은 일찍부터 기계적이고 체계적인 디자인을 고도화했지만, 패션·주얼리 등 전통 수공업에 뿌리를 둔 이탈리아는 장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개인적인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좋은 명품’을 만드는 능력과 ‘좋은 지하철 지도’를 만드는 능력은 서로 다른 것이다.
英·伊 서로 다른 지하철 지도
이렇듯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보편화하는 미래 사회는 어떤 능력을 주목할까. 많은 사람이 ‘창의적 창작 능력’을 미래 인재의 핵심 역량으로 꼽는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인간의 창의성’은 기술로 완벽하게 자동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작자로서 ‘디자이너’의 중요성은 나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좋은 디자인’은 국가의 문화적 품격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판단하는 주요 지표가 될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어떻게 나올까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은 어떻게 탄생할까.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 까다로운 배우자 덕분에 감칠맛 나는 손맛을 지닌 푸드 디자이너가 탄생하듯, 디자인을 향한 국민적 관심은 국가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 한국은 글로벌 시장의 ‘테스트 베드’라는 말이 있다. 한국 소비자는 유독 디자인에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한국인의 눈에 들기 위해 분투하다 보면 절로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디자인을 만들려면 그와 더불어 디자이너에 대한 존중이 수반돼야 한다. 존중 없는 관심은 자칫 월권으로 변질되기 쉽다. 마케팅 기획이나 전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도 로고의 색상이나 형태를 정할 때는 목소리를 높인다. 국내 대기업조차 오너나 비전문가 임원에 의해 디자인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병을 고치려면 의사의 말을 잘 따라야 하듯, 좋은 디자인을 만들려면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또 다가올 미래에 대비한 통합적 디자인 인재 교육이 필요하다. 영국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박물관을 다니며 명작을 보고 비평하는 교육을 받는다. 이 덕분에 영국 국민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대한 심미안을 갖게 된다. 우리도 디자인 싱킹 교육을 저학년 교육과정에 포함해 체계적으로 창의적 사고력을 지닌 디자인 인재를 길러야 한다. 디지털 혁신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디자이너에겐 감각적인 조형을 창작하는 능력을 넘어 AI, 블록체인 등 새로운 디지털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능력까지 함께 요구된다. 한국 사회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의대나 로스쿨에 보내고자 하지 디자인 대학으로 보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가 영재성을 보이면 주저 없이 디자이너가 되라고 장려하는 핀란드와는 반대다. 이런 영향으로 핀란드는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 알토와 도자기·유리 디자이너 카이 프랑크를 배출할 수 있었다. 창의성 있는 우수 인재들이 생각하는 디자이너로 진화할 때, 우리는 좋은 디자인이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품격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윤주현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