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통령 선거를 결정한 힘은 ‘정권 교체’의 열망이었다. 대통령 선거는 늘 정권 교체가 주제지만, 이번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이 더해졌다. 현 정권이 대한민국의 구성 원리와 실체를 적극적으로 허물었으므로, 이번 선거는 그 사실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자연히, 정권 교체를 내건 새 대통령에게 시민들이 부여한 위임사항(mandate)은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와 실체의 회복이다. 일반적으로 위임사항은 후보가 내건 공약들이지만, 이번엔 정권 교체의 열망에 담긴 희원(希願)이, 즉 대한민국의 구성 원리와 실체의 회복이라는 근본적 과제가 위임사항이다.
이 점은 강조돼야 한다. 여당 후보가 민중주의(populism)에 바탕을 둔 공약들을 쏟아내자 야당 후보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게 됐다. 따라서 비합리적인 민중주의적 공약이 많이 나왔다. 진정한 위임사항에 어긋나는 공약들이 조용히 시들도록 하는 일은 긴요하다.
위임사항의 근본인 구성 원리의 회복은 우리 사회에 깊이 스며든 전체주의의 특질들을 걷어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권력기관과 언론기관들을 현 집권당이 장악한 터라서, 이 일은 어렵고 더딜 것이다.
대한민국의 실체에서 가장 심각하게 훼손된 부분은 안보다. 우리 안보의 바탕인 한·미 동맹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맺은 동아시아 동맹의 한 부분이다. 이 3자 동맹에서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은 굳건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맹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약했다.
북한은 이런 약점을 파고든다. 이른바 김일성의 ‘갓끈 전술’이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갓끈 가운데 하나만 자르면, 남조선의 갓은 날아간다”는 얘기다. 삼자 동맹의 약한 고리인 한·일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 안보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다.
당장 북한 핵무기에 대한 방책에서도 일본과의 협력이 긴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여러 해 전에 사라졌다. 이제 북한의 비핵화를 얘기하는 것은 북한 핵무기의 위협을 외면하자는 얘기밖에 안 된다. 현실적 방안은 극동 주둔 미군이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핵무기의 배치나 개발을 우리 혼자 추진하기는 어렵다. 군사적 이익이 합치하는 일본과 함께 추진하면, 가능할 뿐 아니라 훨씬 효과적이다.
갑자기 험난해진 경제 상황을 헤치는 데도 우리는 일본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한·일 경제 협력은 국가 간 경제 협력이 가장 이상적으로 이뤄진 경우다. 일본의 시장이 우리 기업에 열리고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비로소 본격적 경제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뜻에서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성취였다. 그의 위대한 업적인 경제 발전도 한·일 국교 수립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 국민의 다수가 격렬하게 반대하는 일을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추진했다는 사실은 그 성취에 비장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30여 년 뒤 배타적경제수역(EEZ)이 적용되면서 두 나라는 어업협정을 맺어야 했다. 어민들의 생계가 걸려서 타협이 무척 어려운 이 과제를 김대중 대통령은 독도 문제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풀었다. 한·일 어업협정은 그의 여러 업적 가운데 으뜸이었다.
꽉 막힌 한·일 관계를 풀어서 3자 동맹을 강화하고 북한 핵무기에 함께 대응하며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바탕을 마련한다면, 그것은 새 대통령의 가장 큰 성취가 될 것이다. 다섯 해 동안에 이룰 수 있는 것 가운데 그것보다 큰 성취를 떠올릴 수 없다.
한·일 관계의 정상화는 참으로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토착 왜구’와 같은 독 묻은 화살들을 맞으면서 협상에 나서야 한다. 일본 지도자도 한국에 호의적이 아닌 국내 여론의 제약을 받는다.
그 힘든 과제를 좀 수월하게 만드는 방안 하나는 새 대통령이 일본을 첫 방문국으로 삼는 것이다. 일본은 그 성의에 감동할 것이고, 미국은 선선히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방안은 일본과 중국 가운데 어느 나라를 먼저 찾을 것이냐 하는 난제를 우회할 수 있다. 일본을 미국보다도 먼저 찾으니, 중국도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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