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들이 막판까지 침묵을 지키는 게 있다. 인플레다.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인 국민에게는 사실 대장동이니, 검찰공화국이니 하는 논란은 다 한가한 얘기다. 전방위로 치솟는 물가만큼 당장 큰 걱정거리는 없다. 누가 대권을 잡더라도 집권 후 가장 시급한 경제 현안은 바로 인플레일 것이다.
그런데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는 대선 주자 입에서 인플레를 잡겠다는 공약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막대한 돈 살포 공약을 쏟아내면서 물가를 잡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아서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다.
약자를 위한답시고 내놓은 정책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약자를 힘들게 했는지는 이 정부 들어 무수히 봐왔다. 돈 풀기 역시 경제적 약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명분으로 내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주 열린 경제학 공동 학술대회에서 한 논문이 발표됐다. ‘가계 이전지출과 소득 불평등 간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은 언론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여기에는 정부는 물론 대선 후보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세 명의 경제학자가 쓴 이 논문의 결론부터 소개하면, 정부가 가계 이전소득을 늘려줄수록 장기적으로 소득 불평등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전소득은 재난지원금처럼 정부가 무상으로 가계에 지원해 생기는 소득이다. 저자들은 “이전소득 증가가 저소득층 가계의 복지 의존성을 높여 장기적인 소득 창출 기회를 제약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코로나 국면에서처럼 피해는 저소득층에 집중되는데, 무차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소득 상위계층의 여윳돈만 불려줘 불평등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돈 풀기가 불러오는 인플레 충격이다. 최근 인플레는 글로벌 공급망 혼란으로 인한 외부 요인도 크지만, 그동안 막대하게 풀린 유동성에 의한 내부 요인도 만만치 않다. 이 정부 들어 재정이 400조원 추가로 풀렸고, 통화량(M2)은 작년 한 해에만 410조원 이상 늘었다.
‘I(인플레) 공습’이 이미 시작됐는데도, 정부는 멈출 줄 모른다. 대규모 적자국채를 쏟아내고 한은은 이를 매입해 시중에 통화량을 더 풀 태세다. 대선 후보들은 인플레에 기름을 붓고 있다. 여야 후보 각각 공약 이행에 300조원 안팎의 돈이 든다는데, 각 후보 진영에서 보수적으로 자체 계산한 숫자가 이 정도이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게 분명하다.
인플레의 본능은 악랄하다. 경제적 약자를 집중 공격해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엥겔계수가 높은 소득 하위계층일수록 타격이 크다. 임금 근로자도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인플레 국면에선 임금이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실질 임금이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인플레는 필연적으로 금리 인상을 동반하는데, 이 역시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힌다. 은행 예금이자는 물가보다 더디게 오르니, 열심히 돈 모아 저축한 사람만 손해 보게 돼 있다. 집값 급등 불안에 한도껏 대출받아 막차를 탄 ‘영끌족’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출이 많은 자영업자, 영세 중소기업도 인플레, 금리 인상에 취약하다. 결국 인플레란 망령은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게만 차별적으로 타격을 입힌다.
정부와 여당, 대선 후보들의 선거용 돈 살포에 경제적 약자들이 “우리에게 독약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며 항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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