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2,501.24

  • 20.61
  • 0.83%
코스닥

677.01

  • 3.66
  • 0.54%
1/3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스페인, 남미에서 금과 은 대규모로 들여왔지만…대부분 사치품 구입과 화려한 건물 짓는데 사용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흥청망청 들여온 금과 은 덕분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었고, 최고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화려한 성당과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귀금속의 유입은 스페인 경제를 한 단계 비약시킬 수 있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은의 대량 유입으로 스페인에 형성됐던 상업과 산업발전에 적합한 여건은 1550년대를 넘어서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스페인이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썼음에도 스페인에 유입된 은은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펠리페 2세 궁정의 재무관은 “마치 스페인이 서인도제도의 조그만 나라인 것처럼 은이 유출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스페인을 빠져나간 은은 빌바오를 통하든지 아니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거쳐 앤트워프나 잉글랜드 등 북부 유럽 지역으로 흘러갔다.

그나마 쓸 수 있는 방대한 자원도 생산적인 곳에 투입되지 못했다. 대부분 부질없는 대외 전쟁 비용이나 대외 교육 수지 적자를 보전하는 데 쓰였다. 사치품을 사거나 허영을 반영한 건물을 짓는 데도 큰 돈이 쓰였다. 이렇게 된 원인으론 스페인이 제조업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였다기보다는 원재료를 수출하는 경제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식량 구입도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

이 시대 스페인에서 중산층이 매우 희박했다는 점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카스티야 지역에서 일부 양모 거래 등으로 성장한 상인 계층이 있었지만 시몬 루이스 같은 일부 예외적인 상인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상업세력이 크게 미약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 가문 중 시몬 루이스보다 더 큰 상인 가문만도 20여 개가 넘었다. 그나마 일부 돈을 번 상인도 상업에 적대적인 사회적 편견 탓에 농업 지주의 타이틀을 얻고자 노력했다. 페르낭 브로델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부르주아지의 반역’이라고 불렀다.

상업과 산업 시설이 미약한 것은 가격 상승의 충격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렸다. 다른 유럽 국가는 스페인보다 가격 혁명의 충격이 적었는데, 이는 싼 가격에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선 그런 능력이 없었다. 당시 스페인에선 상업에 적대적인 편견이 적지 않았다. ‘상업으로 먹고사는 것은 귀족의 방식이 아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군인과 문인만 우대되던 사회에서 “아무도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길 원하지 않았다”는 게 당대 신학자 바르톨로메 알보르노스의 전언이다. 이에 따라 스페인의 상업은 이탈리아인이 장악했다.

물가 상승이 미증유의 사태였던 만큼, 당시 스페인 정부도 귀금속의 유입과 물건 간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나올 수 없었다.

‘가격혁명’의 원인은 크게 ‘신대륙 은의 대량 유입’과 ‘인구 증가 및 식량 공급 간 격차’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된다. 당대인들은 대부분 생활물가고 차원에서 접근했지만 일부 경제학자는 그때도 은의 대량 유입에서 원인을 찾았다.

1556년 스페인의 법률가였던 마르킨 데 아스필쿠에타 나바로와 1568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보댕은 은의 유입과 인플레이션 간 상관관계에 관한 가설을 세웠다. 스페인 살라망카 학파의 시각도 비슷했고 후대의 애덤 스미스도 “한 벌의 금은 식기 가격이 15세기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들고, 동일한 노동이나 상품의 지출로 예전보다 세 배나 많은 금은제 식기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메리카 광산이 풍부해 금과 은이 싸졌기 때문”이라며 이 같은 입장을 지지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정부가 앞다퉈 불량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물가가 급등했다고 봤다. 통화량이 늘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설명은 16세기 유럽의 인구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식량 생산이 이런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 데서 가격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는 관점이다. 전 유럽이 같이 영향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농경의 개선과 인구 증가가 변수로 고려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1500년대 초 스페인의 인구는 700만 명에 불과했다. 이는 300만 명에 불과했던 잉글랜드보다는 많은 것이었지만 15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프랑스나 2200만 명의 인구 대국 오스만투르크에 비해선 크게 왜소한 수치였다. 하지만 스페인 인구는 1600년께까지 큰 단절 없이 꾸준히 늘었다.
NIE 포인트
1. 세계 경제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인플레이션 사례를 찾아보자.

2.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정책은 어떤 것이 있을까.

3. 스페인이 금과 은의 대량 유입에도 산업발전이 안 된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자.


- 염색되는 샴푸, 대나무수 화장품 뜬다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