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은 거대한 주사위, 상자 같기도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하나의 커다란 볼륨을 가진 건축물이다. 지하 7층~지상 22층 규모다. 여러 동의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단아하고 간결한 형태다. 거대하고 꽉 차 보이지만 수직으로 과하게 높지 않아 한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기교는 없어도 되레 편안하고 풍부한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을 설계한 영국 출신 세계적 건축가인 데이비드 치퍼필드(69)는 2018년 내한 당시 “절제됐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말했다.치퍼필드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영국 조정 박물관 등 30여 년간 주로 전 세계 주거 상업시설 및 공공 문화예술 건축물을 디자인해 왔다. 이 때문에 그가 설계한 대다수 건물엔 심미성(審美性)이 녹아 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에도 하나의 거대 조각품 같은 이미지를 담아냈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 도심 속에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특이성(singularity)’이 담긴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고층 빌딩이 많은 곳에서 도시 전경에 이바지할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며 “복잡한 형태에서 단순해지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국의 미를 나타내는 달항아리 백자를 건축 콘셉트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ㄷ자 모양으로 여러 겹 쌓아 올린 건물
건물은 단순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추상적이면서도 고유의 몸짓이 숨어 있다. ‘ㄷ’자 모양으로 여러 겹 쌓아 올린 듯한 형태로 지어졌다. 이 ‘ㄷ’자 모양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뚫려 있다. 각 층의 뚫려 있는 공간 사이에 한옥의 ‘중정’과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개방적이면서도 사생활을 지킬 수 있는 로지아(logia·한쪽 또는 그 이상의 면이 트여 있는 방, 혹은 복도) 특징을 지닌 한옥의 중정에 매료된 건축가의 의지가 반영된 공간이다.루프가든은 이 중정 공간에 조성된 세 개의 정원이다. 자연통풍과 채광을 최대화하고자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 비율을 세밀하게 조정해 탄생시켰다. 5층과 11층, 17층에 마련됐다. 5~6개 층을 비워낸 독특한 구조 덕분에 건물 어느 곳에 있더라도 언제든 도시와 산의 아름다운 경관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쉴 수 있다. ↘
건물 외관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역시 자연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햇빛을 차단하는 나무 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유선형의 수직 알루미늄 핀을 외관에 설치했다. 이 핀은 직사광선으로 인한 눈부심을 막아주고 열기를 감소시킨다. 특히 자연 채광을 실내 공간에 골고루 확산시켜준다. 핀들을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얗고 긴 자작나무가 심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이 핀들이 강렬하면서도 개방적이고 날렵한 인상을 부여해 건물에 일관된 표정을 만든다.
‘기업’과 ‘지역사회’의 연결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처음 건물을 지을 당시 ‘연결(connectivity)’을 기본 원칙으로 정했다. 건물을 통해 자연과 도시, 지역사회와 회사, 고객과 임직원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감과 소통이 이뤄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옥은 연결에 바탕을 둔 설계 디자인으로 역동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다.루프가든은 건물 규모를 가늠하게 하는 동시에 건물 주변을 둘러싼 공원 속 자연이 건물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한다. 치퍼필드는 “공중공원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공기 순환이 가능한 자연 공간”이라며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사무 공간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말했다.
출입 공간에 설치된 공공 아트리움 역시 건물 전체를 도시로 환원하는 역할을 한다. 또 사옥 안에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도서관, 대강당, 오설록 티 룸, 상점과 같은 다양한 공공시설이 어우러져 있다. 기업 사옥이 본연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넘어 사회와 연결돼 대도시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공공적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그룹 본사는 2018년 제21회 한국건축문화대상 민간부문 대상과 제9회 대한민국 조경문화대상 정원 부분 대상을, 2019년엔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