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눈망울에 장난기 넘치는 표정. 경기 중에 실수해도 씩 웃어넘기는 김효주(26·사진)에게선 천재 특유의 여유가 묻어난다. 후배 골퍼들도 “김효주 언니처럼 친다면 저도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올해는 김효주가 세계에 ‘천재의 귀환’을 알린 중요한 시즌이었다. 지난 5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HSBC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5년3개월 만에 투어 통산 4승을 달성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도 2승을 따내며 길었던 슬럼프를 완전히 끝냈음을 증명했다.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LPGA 투어에서 꼭 우승하고 싶었는데 일찌감치 목표를 달성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즐겁게 경기할 수 있었던 해였다”고 말했다. “‘우승본능’을 되찾으면서 한 번 더 뛰어오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설명이다.
김효주는 2012년 아마추어로서 KLPGA 투어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각각 1승을 거뒀다. 2014년에는 비회원으로서 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LPGA 투어에서 2승을 추가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2016년부터 긴 우승 가뭄을 겪었다. 강행군으로 체력이 떨어지면서 샷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적이 떨어지자 조급함이 생겼고 완벽하던 스윙 리듬도 흐트러졌다. 송곳 같은 샷으로 경쟁자들을 위협했던 그였지만 2018년에는 그린 적중률이 134위(63.85%)까지 하락했다.
긴 슬럼프를 겪으며 골프가 미워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골프에 더 진심이 됐다고 한다. “잘 안 풀리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과거에 잘쳤던 샷들을 찾아봤어요.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씩 문제를 풀어가면서 골프의 재미를 다시 한번 느꼈죠. 저는 갈수록 골프가 더 재미있고 좋아요.”
터닝포인트는 지난해였다. 코로나19가 터지자 김효주는 국내 잔류를 택했다. 강도 높은 체력훈련으로 근육을 4㎏ 늘리고 몸집도 키웠다. 힘이 생기자 비거리가 늘어났고 지난해 KLPGA 투어에서 2승을 올리며 상금왕과 다승왕, 최저타수상까지 휩쓸었다.
오랜만에 맛본 우승만큼이나 큰 소득은 한국에서 얻은 에너지다. 친한 선수들과 함께 경기하며 골프 자체에 집중하게 됐다고 한다. “팬들의 응원도 큰 힘이 됐습니다. 갤러리로 오진 못하셨지만 팬카페와 SNS에서 제 한국 활동을 반겨주셨고, 그 기운이 올해까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필드 위의 김효주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같은 조 경쟁자들에게 농담을 건네며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고, 다른 선수의 샷으로 생긴 커다란 디봇을 챙기기도 한다. HSBC 챔피언십에서는 햇빛 알레르기와 벌레 때문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경기했고, 클럽하우스에서 밥을 먹다가 우승 소식을 접해 팬들을 즐겁게 했다. “예전에는 선배들 앞이어서 조심스럽기도 했고 얌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성격을 누르고 지냈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경기 중에도 편안해진 것 같아요.”
도쿄올림픽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워낙 큰 기대를 해주셔서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퍼팅이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메달을 못 따 국민들께 죄송한 마음이 컸는데, 박세리 감독님이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말씀해주셔서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올 시즌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의 우승이 예전보다 줄어들면서 ‘한국 여자 골프의 위기’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잘하는 선수가 많아졌고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진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는 “더 많은 후배가 LPGA 투어에 도전해 더 큰 무대에서 함께 경쟁하고 우승 수를 늘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효주는 지금 골프채를 잠시 손에서 놓고 체력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시즌이 끝나면 한동안 골프는 아예 쉬어야 골프채를 다시 잡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는 올겨울 국내에서 체력훈련에 집중할 예정이다. 근육으로 슬럼프 늪을 빠져나왔기에, 근육이 주는 정직한 힘을 믿는다고 한다.
내년 시즌 목표는 미국에서의 우승이다. “HSBC 챔피언십으로 LPGA 투어 우승을 재개했으니 이번엔 미국 땅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그리고 일정이 된다면 가급적 한국 대회에도 많이 출전해 팬들을 만날 계획입니다. 한국에서도 한번은 우승하면 좋겠지요?”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