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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서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한 M&A 공방전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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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기업 인수·합병(M&A)이 급증하는 일본에서 대기업이 아닌데도 집중조명을 받는 중견기업이 있다. 지난 9월10일에는 일본 전역의 신문사와 통신사 마흔 곳이 이 회사의 적대적 M&A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내기도 했다. 도쿄기계제작소가 그 주인공이다. 1916년에 창업해서 1949년 도쿄증시 1부시장에 상장한 노포기업이다.

언론사들이 이례적으로 개별 기업의 M&A에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도쿄기계제작소가 일본 최대 윤전기 제조회사이기 때문이다. 1906년 일본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윤전기를 개발했다. 일본 뿐 아니라 한국 신문사들도 대부분 도쿄기계제작소의 윤전기를 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수 난타전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을 접목한 첨단 윤전기를 개발하고 있지만 신문시장이 위축되는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있다. 2018년 132억이었던 매출이 매년 10% 안팎씩 줄어 올해는 105억엔까지 쪼그라들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4년간 총 영업이익도 2억엔 적자다.

그런데도 주가는 지난 4개월 동안 급등락을 반복했다. 최근 5년 동안 500엔 안팎이던 주가가 지난 9월9일 3360엔까지 뛰었다. 지금은 1300엔대로 순식간에 1/3토막이 났다. M&A가 아니라면 이렇게 주목을 받을 일도, 주가가 급등할 일도 없는 회사다.


적대적 M&A는 곧잘 중세 공성전에 비유된다. 도쿄기계의 적대적 M&A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 회사의 경영권을 놓고 벌이는 공성전 한 판으로 일본 주식시장의 주요 제도와 향후 일본 시장의 변화를 대부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공방전이 벌어져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도쿄기계 공성전'의 방어진영은 도쿄기계 경영진, 공격진영은 아시아개발캐피털(ADC)이라는 사모펀드(PEF) 운용사다. 아시아개발캐피털 역시 도쿄증시 2부시장에 상장된 상장기업이다.

지분 35%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홍콩 투자그룹이어서 순수 일본기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시아개발의 주가 또한 도쿄기계 공성전의 판세에 따라 급등락을 반복했다.


공성전은 지난 7월20일 공식 개시됐다. 이날 아시아개발은 "7월13일 기준 도쿄기계 지분 8.08% 보유하고 있다"고 대량보유보고서를 간토재무국에 제출했다. 보유목적은 '순수한 투자 차원'이라고 밝혔다. 상장사 주식 5% 이상을 새로 보유하면 보유현황과 목적을 공시해야 하는 '5% 룰'을 따랐다.

하루 뒤인 7월21일 아시아개발은 "7월14일 기준 도쿄기계 지분 15.01%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하고 보유목적도 '경영권 획득'으로 바꿨다. 하루 만에 보유지분을 6.93% 늘리면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7월30일 아시아개발은 7월21일 기준 보유지분을 32.72%까지 늘렸다고 공시했다. 5거래일 만에 지분을 다시 2배 이상 늘렸다. 9월13일에는 보유지분을 40%까지 끌어올렸다.


방어진영인 도쿄기계의 주주구성은 전형적인 일본 노포기업의 모습이다. 손보재팬 5.7%, 미쓰이스미토모은행 5.4%, 일본증권금융 2.7%, 미즈호은행 2.4% 등 금융사들이 지분을 2~6% 내외씩 나눠갖고 있다. 100년을 넘은 일본 기업들은 오너 2세,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속증여세를 내느라 지분이 점점 줄어든다. 결국은 채권회사인 금융회사들이 조금씩 지분을 나눠가지는 구조가 된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
'친도쿄기계 주주'라고 할 수 있는 이 지분은 19.9%. 아시아개발의 절반이다. 전투 초반부터 승부가 급격히 기운 것은 아시아개발의 공성전략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에서 상장사를 상대로 이렇게 갑자기 지분 40%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 금융상품거래법의 의무공개매수(TOB) 제도 때문이다. 의무공개매수란 상장사의 지분을 1/3이 넘게 사들일 경우 나머지 주주들에게도 똑같은 가격과 조건으로 주식을 팔 기회를 주도록 한 제도다.

오너 일가가 지분 30%를 가진 A상장사의 주가가 1만원인데 B회사가 오너 일가 지분 30%만 산다면 어떻게 될까. 인수가격은 경영권 프리미엄 30%를 얹은 주당 1만3000원으로 가정하자. 오너는 주당 3000원씩 이득을 보고 지분을 팔지만 나머지 지분 70%를 보유한 일반 주주들은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1만3000원까지 오르면 다행이지만 M&A가 주가를 떨어뜨리는 재료도 될 수 있다. 의무공개매수는 이러한 불공평을 막기 위한 제도다. 미국과 일본, 유럽은 모두 의무공개매수를 의무화하거나 사실상 이행하도록 제도화했다. 한국은 이 제도가 없다.

의무공개매수는 M&A 시장의 선전포고다. 방어진영은 성을 지킬 채비를 갖출 수 있다. 의무공개매수를 하는 매수자는 모든 주주들을 대상으로 주당 매입가격과 매입량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매입기간은 최소 20영업일 이상이어야 한다. 방어진영은 한 달 가량 지분을 추가로 사들이거나 기존 주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경영권을 방어할 시간이 있는 셈이다.

아시아개발은 선전포고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분을 40%까지 모았다. 도쿄기계에 인수제안을 하는 대신 주식시장 거래시간 동안 주식을 사모았기 때문이다. 장내에서 주식을 사모으는 경우는 의무공개매수 대상이 아니다.

경영권을 확보하려면 적어도 지분 30% 이상을 모아야 한다. 이 정도 되는 규모의 주식을 사려면 대주주에게 '주식매매계약'을 제안하는게 상식이다. 시장에서 한주한주 지분을 사모으는 상황은 가정조차 하지 않아서 따로 규제대상에 넣지 않았다.

아시아개발은 이 틈을 파고 들었다. 양측의 지분율이 40%대 20%여서 승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아시아개발의 기습공격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도쿄기계는 전대미문의 비책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전대미문의 방어전략 'MOM'
도쿄기계는 8월6일 기존주주에게 무상으로 신주인수권을 주는 매수방어책을 도입하기로 했다. 새 주식을 받으면 기존주주들은 지분이 확 늘어난다. 반면 최근에 주식을 매집한 아시아개발은 신주를 받지 못해 지분이 희석된다.

관건은 주주투표의 관문을 넘느냐였다. 신주인수권을 주는 매수방어책을 도입하려면 주주투표를 거쳐야 했다. 정상적인 표대결로는 지분 40%를 가진 아시아개발이 매수방어책을 통과시킬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도쿄기계가 내놓은 비책이 '긴급피난조치'다.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서 매수방어책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데 도쿄기계와 아시아개발 지분을 빼고, 이해관계가 없는 주주들만 표결에 참여하도록 규칙을 바꿨다.

아시아개발과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으니 일단 성밖으로 피해 싸움 자체를 피한 뒤 제3자인 주주들에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한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가 경영권 방어책을 쓸 지 말 지를 정하는 중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머조리티 오브 마이노리티(MoM·소수주주 가운데 과반)'이라고 한다.



대주주의 의향만으로 경영권 방어책 같은 중요사항을 결정하면 소수주주가 일방적으로 불리해지기 때문에 이를 막는 장치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제도였다. 전국 신문사·통신사 40개사가 "아시아개발이 도쿄기계를 인수하면 각 언론사의 인쇄·생산체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독자들께 뉴스를 전달하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지원사격에 나선 것이 이 무렵이다.

지분 40%를 보유하고도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아시아개발은 "MOM은 '주주평등의 원칙'에 반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9월17일 도쿄지방법원에 경영권 방어책을 MOM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다. 닷새 뒤에는 임시 주총에서 아시아개발의 의결권 행사를 인정하게 해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다. 두 회사의 난타전이 극에 달하자 도쿄기계 주가는 장중 한때 3700엔을 넘기도 했다.

도쿄기계는 10월22일 MOM 방식으로 임시 주총을 열고 79%의 찬성률로 경영권 방어책 도입을 통과시켰다. 아시아개발의 가처분신청으로 경영권 방어책의 발동이 실제로 가능할 지는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결과는 도쿄지법의 1심 판결(10월29일), 도쿄고등법원의 2심 판결(11월9일), 대법원 판결(11월18일) 모두 도쿄기계의 승리였다. 일본 M&A 시장에서 MOM 방식으로 경영권 방어책을 실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처음 마련됐다.

법원이 도쿄기계의 손을 들어준 건 의무공개매수, 즉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장내에서 지분을 집중매집하는 행위가 기존 주주들에게 보유주식을 급매처분하는 압력을 가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임시 주총에서 MOM 방식으로 제3자 주주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 79%가 경영권 방어책 도입에 찬성한 것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승기 잡고도 여론전서 패한 PEF

아시아개발은 의무공개매수 제도의 허점을 노려 승기를 잡아놓고도 여론전에서 완전히 밀린게 패인이 된 셈이다. 제3자 주주의 80%가 도쿄기계 쪽으로 돌아선 이유가 있다. PEF가 회사를 인수할 때는 '앞으로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언제까지 얼마만큼 높이겠다'라는 구체적인 개선계획과 사업계획을 제시하면서 주주들을 설득한다.

아시아개발은 주가가 "저평가됐기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는 왜 도쿄기계에 적대적 M&A를 시도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기습공격을 해 놓고도 왜 그랬냐는 질문에 '성벽이 너무 낮아서'라는 뜬금없는 대답만 한 것이다.

아시아개발은 내년 2월까지 현재 40%인 보유지분을 32.72% 이하로 줄인다는 서약서를 제출했고, 도쿄기계는 19일 발동할 계획이었던 경영권 방어책을 일시적으로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아시아개발은 17일 "도쿄기계를 인수한다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며 "새롭게 주식공개매수(TOP)를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단 후퇴한 뒤에 2차 공격을 준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일본 IB업계가 도쿄기계의 적대적 M&A에 주목한 건 일본에서 이러한 공방전이 자주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사업재편이 매우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기업들은 회사에 이익이 된다면 터부시하던 적대적 M&A를 불사한다. PEF와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도 공방전이 잦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지금도 일본 최대 온라인금융회사 SBI그룹이 대형 지방은행인 신세이은행과 적대적 M&A 공방을 벌이고 있다. 대형 슈퍼마켓그룹인 H2O리테일링과 오케이는 간사이 지역 중견슈퍼인 간사이슈퍼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연간 40~50건 수준이던 일본의 공개매수 횟수가 매년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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