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네트웍스가 추진해온 1조원 규모의 매트리스 업체 지누스 인수가 최종 계약을 앞두고 사외이사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지난 9월 SKC의 음극재 사업 투자 안건이 보류된 데 이어 SK 경영진이 추진한 대규모 투자 건이 이사회에서 잇따라 제동이 걸린 것이다.
경제계에선 “이사회 중심의 자율 경영을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강화할 것”을 주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반면 회사가 미래 성장을 위해 준비한 대규모 투자 건에 대해 사외이사들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SK 사외이사들의 잇단 ‘반란’
SK네트웍스는 국내 가구·매트리스 제조업체인 지누스 지분 인수 협상이 최종 결렬됐다고 19일 공시했다. 이날 오전에 열린 이사회에서 지누스 지분 약 40%를 1조1000억원에 인수하는 안건이 이사 과반의 반대로 부결됐기 때문이다.지누스는 매트리스와 침실 가구류를 기반으로 거실, 주방, 사무용 가구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SK네트웍스는 가구 시장의 성장성과 지누스의 제품력 및 판매망에 관심을 가져왔다. 렌털 사업을 운영하는 자회사 SK매직의 고객망과 지누스의 제조 역량을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인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에선 인수 가격의 적정성을 놓고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네트웍스 이사회는 박상규 대표와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 3명의 SK 측 이사진과 경영·회계학 교수, 법조인으로 구성된 5명의 사외이사를 더해 8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중 과반인 5명 이상이 반대하면서 인수 건이 최종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 관계자는 “이사회는 지누스가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회사라는 점에는 공감했다”면서도 “자금 부담이 큰 인수 건인 만큼 좀 더 시간을 갖고 성장 기회를 모색해 나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SK그룹 계열사에서 사측이 추진한 투자 안건이 이사회에서 부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월 SKC 이사회에선 영국 음극재 업체 넥시온과의 합작투자 안건이 이사들의 반대로 부결된 뒤 한 달여의 계약 조건 보완 작업을 거쳐 통과됐다. 8월 열린 SK㈜ 이사회에 상정된 한 투자 안건은 1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이사들의 찬성으로 의결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SK, 이사회 중심의 ‘자율경영’ 정착
업계는 SK 이사회의 ‘반란’에 대해 최 회장이 최근 아젠다로 부각시킨 ‘거버넌스 스토리’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최 회장은 13개 주요 계열사 사내외 이사들과 세 차례에 걸쳐 워크숍을 열어 지난달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혁신 방안을 내놨다.이사회가 대표이사 평가 및 후보 추천을 비롯해 중장기 성장전략 결정 등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역할을 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주요 대기업 이사회는 경영진에 대한 감사나 내부 규정 정비 등 수동적인 역할만 담당해 ‘거수기’라는 오명을 들어왔다.
최 회장은 이사회 권한 강화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자율경영 체제를 정착시켜 기업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란 의견을 꾸준히 전달해왔다. 그는 10월 워크숍에서 “거버넌스 스토리의 핵심은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시장에 증명해 장기적인 신뢰를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날 지누스 인수 부결 소식이 알려진 뒤 SK네트웍스 주가는 전날 대비 0.2% 오른 주당 5080원에 마감했다. 반면 지누스 주가는 9.71% 급락했다. 시장은 SK네트웍스의 지누스 인수 철회 결정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셈이다. 다만 일각에선 사외이사들의 제동이 기업의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 속도를 늦추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주회사인 SK㈜가 그룹 주요 계열사 대부분의 대주주로 이사회에 참여하는 만큼 그룹의 의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제계에선 SK그룹의 변화가 투자뿐 아니라 연말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임원 인사에서도 확인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경제계 관계자는 “SK그룹의 이사회 중심 경영 성과를 평가하긴 아직 이르다”면서도 “파격적인 결과가 이어지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황정환/김재후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