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태릉 4만5000가구 공급 늦어지나
9일 국토교통부와 문화재청에 따르면 LH(한국토지주택공사)는 지난 4일 노원구 태릉골프장 개발과 관련해 유산영향평가 용역을 발주했다. 약 3만8000가구 공급이 계획돼 있는 고양 창릉신도시에 대해서도 이달 유산영향평가 용역에 들어갈 계획이다. 2019년 5월 정부가 발표한 3기 신도시 중 한 곳인 창릉은 인근에 서오릉(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이 자리잡고 있다. 태릉골프장 역시 역사문화환경 보존 지역인 태릉에서 50m, 강릉에서 200m 거리에 있다. 두 사업지는 지구 일부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 포함돼 현상변경 허가를 위한 문화재위원회 심의 대상이다.국토교통부가 법적 의무사항인 현상변경 허가 심의와 별도로 유산영향평가도 시행하기로 한 것은 인근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대가 극심해서다. 유네스코 역시 두 사업지에 대해 유산영향평가를 시행하도록 별도로 권고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주택 공급이 최우선 과제이기는 하지만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유산영향평가 절차가 추가되면서 사업 일정은 물론 공급 계획에도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산영향평가는 용역 기간만 약 1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향후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검토도 거쳐야 한다. 국내에서 이 제도를 시행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도 불안 요소다.
평가 결과 부정적 영향이 예상되면 계획변경 등도 해야 한다. 기존에 국토부가 확정한 높이 계획과 그에 따른 공급 규모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8·4대책’에서 1만 가구 공급을 계획했던 태릉골프장은 문화재 이슈가 불거지면서 올 8월 공급 규모를 이미 6800가구로 줄여 잡았지만 여전히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왕릉 밀집 수도권 주택공급 ‘직격탄’
정비업계에서는 기존 환경영향평가, 교육영향평가 등에 더해 유산영향평가까지 도입되면 주택 공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지금도 문화재 주변 개발을 할 때 심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유네스코 권고 기준이 반영된 유산영향평가가 도입되면 규제가 한층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일례로 현재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서울은 문화재로부터 100m, 경기는 500m인 반면 유네스코는 1㎞를 권고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내 심의는 문화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유산영향평가의 국제 기준은 주변 환경도 보기 때문에 더 광범위할 수 있다”며 “국내와 국제 기준 간 상이한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 국내 적용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시민단체 등의 문화재 보호 요구가 거세지는 것도 부담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 등은 “창릉신도시 개발 등으로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취소될 수 있다”며 문화재 보존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인구 대비 주택이 부족해 개발 압력이 큰 수도권이 직격타를 맞을 전망이다. 인허가가 지연되고 용적률, 높이 제한 등으로 사업성이 낮아지는 곳도 잇따를 수 있다. 국내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만 총 40기로 대부분이 수도권에 분포돼 있다. 이 밖에 서울 창덕궁과 종묘, 경기 수원 화성 등도 세계문화유산이다. 종묘 인근 종로구 세운4구역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 적정 높이를 정하는 데만 5년이 걸렸다. 당초 122m로 계획했던 건축 높이는 최종 52.6m로 반토막 났다.
최근에는 김포 장릉 인근에 공급되는 검단신도시 아파트가 세계문화유산 가치를 훼손한다는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아파트 때문에 김포 장릉 능침 앞에서 계양산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시공사들이 제시한 개선안에 대해 지난달 29일 심의를 보류했고, 이달 추가 심의를 하기로 했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철거 포함) 몇 가지 대안을 시뮬레이션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