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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시범 보이다'에 씌워진 겹말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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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어에서 잉여적 표현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국어에서는 대개 한자어를 중심으로 토박이말이 덧붙는 경우가 많다. 한자어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살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홍성원의 소설 《육이오》에는 ‘넓은 대로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오직 불길만이 휘황하게 타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대목이 나온다(표준국어대사전).
군더더기 비판하지만 ‘시범하다’는 어색해
‘대로(大路)’는 크고 넓은 길이다. ‘대로’만 써도 되는데 앞에 ‘넓은’을 더했으니 중복 표현이다. 하지만 구의 형태로 이뤄져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읽고 쓰는 데 거슬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글의 흐름상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표현이 의미 중복에 해당한다는 것과 그런 말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입말을 비롯해 수필 등 시적 표현이 허용되는 글이라면 ‘넓은 대로’라고 한들 시비 걸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간결함을 생명으로 하는 신문방송이나 보도자료 등 공공언어를 쓰는 데라면 기피 대상이 된다.

그중 중복어로 자주 지적되는 ‘시범(을) 보이다’ ‘박수(를) 치다’ 같은 말은 관용적 표현으로 인정돼 사전에도 올랐다. 현실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라 그 용법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다만 단어가 아니라 구(句) 형태의 말이므로 띄어 써야 한다. ‘피해(를) 입다’ ‘부상을 입다/당하다’ ‘허송세월을 보내다’ 같은 표현도 겹말 시비에 오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다 용례로 올라 있다. 관용적으로 굳어 그리 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순전히 토박이말 사이에서도 잉여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대통령 후보 경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요즘 이런 표현을 흔히 접한다. ‘달아오르다’는 뭔가가 몹시 뜨거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굳이 앞에 ‘뜨겁게’를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 의미 중복이라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글쓰는 이들 중엔 굳이 그렇게 쓰고 싶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 중복 표현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선거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란 용례가 있다.
규범의 틀에 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길
겹말은 외래어에서도 많이 발생한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텅 빈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에서 ‘부활의 노래‘를 들려줬다.” 지난해 4월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신음하던 때 이탈리아 두오모에서 무관중 공연이 펼쳐져 감동을 선사했다. ‘두오모(Duomo)’는 영어의 ‘돔(Dome)’과 같은 뜻으로, 대성당을 가리키는 이탈리아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밀라노 두오모와 피렌체 두오모가 유명하다. ‘두오모’라고 하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통상 ‘두오모 대성당’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겹말 시비가 있지만,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중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표기가 결정될 일이다.

글쓰기에서 말의 용법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연스러움’이다. 가령 ‘시범 보이다’나 ‘박수 치다’를 겹말이라고 해서 ‘시범하다, 박수하다’ 식으로 쓴다면 오히려 어색해진다. ‘결실을 맸다’ ‘자매결연을 맺다’도 자주 지적되는 군더더기 표현이지만 이를 기계적으로 ‘결실했다’ ‘자매결연했다’ 식으로만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양한 말을 살려 쓰는 게 좋다. ‘결실을 맺다’는 겹말 시비가 있고, ‘결실하다’는 표현이 어색하다. 이를 ‘열매를 맺다’ ‘결실을 보다’ ‘결실을 거두다’ 식으로 문맥에 따라 적절한 서술어와 함께 쓰면 훨씬 맛깔스럽다. 요령은 지나치게 규범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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