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경색은 금융회사들이 돈을 떼일까봐 대출을 꺼려 시중의 유동성이 갑자기 마르는 현상이다. 경기불황이나 기업의 연쇄도산 시기에 주로 나타난다. 경제의 ‘피’와 같은 돈줄이 꽉 막혔다고 해서 ‘돈맥경화’로도 불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지독한 신용경색을 경험했다.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실물경제의 침체가 가속화됐다.
그런데 지금처럼 시중에 돈이 넘쳐나고, 기업파산 소식이 없는데도 가계에 돈줄이 막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계대출을 억제하라”는 정부의 압박에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높이면서부터다. 전세자금 입주잔금 등을 제때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저축은행, 카드사, 보험사 등을 전전한다. 졸지에 ‘대출난민’ 신세가 된 이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이자를 꼬박꼬박 잘 내고 있는 고신용자도 예외가 아니다. 신용대출 한도는 줄어들고, 이자도 치솟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발(發) 신용경색이다.
가계부채는 최근 2년간 많이 늘긴 했다. 2019년에는 58조원(전년 대비 증가율 4.0%) 증가했는데 2020년 128조원(8.5%), 올 상반기에만 벌써 74조원 늘어 잔액이 1705조원에 이른다.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가 1차적인 배경이다. 여기에 집값 급등이 가세하면서 ‘영끌’과 ‘빚투’를 불러오고 이것이 다시 집값을 밀어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 고리를 끊어 집값을 잡겠다는 게 대출 규제의 숨은 의도일 것이다. 부실 위험이 더 큰 자영업자 대출(858조원)과 다중채무자 대출(77조원)에 대한 핀셋 대책은 없고, 대출 총량규제만 밀어붙이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규제를 지속하겠다”고 하니 돈맥경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설사 가계부채를 잘 관리한다 해도 더 무서운 빚 폭탄이 남아 있다. 1000조원에 달하는 정부 부채다. 재정은 위기 때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민간에서 연쇄 부실이 터지고 진짜 신용경색이 발생하면 재정이 ‘소방수’로 나서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세계 각국은 은행, 기업, 가계의 부실을 정부가 떠안아주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구제금융을 투입하고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을 과감하게 풀었던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유로존 등의 정부 부채는 급속히 늘었다. 당시 방만한 복지재정으로 재정이 취약했던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은 혹독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디폴트를 모면했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튼실한 정부 곳간을 바탕으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한 덕분이었다. 2008년 국가채무는 309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26.8%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재정이 튼튼한 편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5년간 재정은 약골로 변했다. 국가채무는 2017년 660조원에서 올해 956조원, 내년에는 1068조원에 이른다. 국가채무비율은 2017년 36.0%에서 내년에 50.2%로 치솟는다. 빚을 내는 적자재정을 편성해 노인일자리, 아동수당 확대, 청년수당, 재난지원금 같은 ‘현금 퍼주기’에 나선 결과다.
문 정부가 끝나면 수많은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다. 건강보험기금과 고용보험기금의 적자를 메워야 하고, 5년간 방치한 국민연금 개혁 문제도 풀어야 한다. 임시로 봉합해둔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코로나 대출(120조원) 폭탄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긴축으로 시장이 발작을 일으키고 자산가격 거품이 꺼지는 등의 리스크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퍼펙트 스톰’이 닥칠 수 있다. 이런 위기가 오면 허약한 재정으로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된다.
가계는 이미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디레버리징(부채축소)에 돌입했지만, 정부의 퍼주기는 대선과 맞물려 멈출 기세가 없다. 고삐 풀린 정부 빚은 놔두고 가계 빚만 잡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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