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가 2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와 10여 년 지속된 아베노믹스(아베 내각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와 작별하게 됐다.”
다음달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이 출범하면 일본의 경제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29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제27대 총재에 선출된 기시다는 네 명의 후보 중 아베 신조 전 총리 및 스가 요시히데 총리 내각의 경제정책과 가장 다른 색깔의 공약을 내세웠다. 기시다 신임 총재는 공약집을 통해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만들어 경제 격차를 시정한다’는 것을 핵심 경제정책으로 제시했다.
분배와 경제 격차 개선 전면에
기시다 총재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개혁 이후 이어져온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전환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복지정책을 축소하고 노동의 유연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분배에 나서는 방식으로 경제 격차를 줄여나가겠다는 것이다.그가 ‘레이와(현재 일본의 연호) 소득 두 배 증가’로 이름 붙인 경제정책에도 중산층 지원정책이 대거 포함됐다. 육아를 하는 세대에 교육비와 주거비 지원을 늘리고, 비정규직 근로자와 중소기업에 코로나19 지원금을 재차 지급하는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아베노믹스로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주가도 네 배가량 올랐지만 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성장의 과실이 흘러들어갔다는 비판을 고려했다는 평가다.
10조엔(약 106조원) 규모의 대학펀드를 설립해 과학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5세대(5G) 이동통신망을 전국에 깔아 지방을 활성화한다는 성장 전략도 내놨다. 탈석탄화와 탈원전에 대해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 기준을 바탕으로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원전 의존도를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다.
경제정책마저 ‘무색무취’ 비판도
일각에서는 ‘자기 색깔이 없다’는 약점이 경제정책에도 투영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막대한 정부 부채를 줄여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겠다면서도 “필사의 각오로 코로나19 대책을 펼치겠다”며 연내 수십조엔 규모의 경제 대책으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실현하겠다고 강조했다.자신의 최대 경제정책으로 내세우는 분배를 위해선 재원이 중요하지만 “향후 10년간은 소비세 등의 증세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새로운 일본형 자본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체가 모호하거나 목표를 뒷받침할 재원을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아베노믹스와 선을 그으면서 어정쩡하게 기존 정책을 답습한다는 지적도 많다. 금융시장은 새 정권이 시행할 금융정책의 변화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 기시다 총재는 “대규모 금융 완화를 지속할 것”이라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그러면서도 금융소득 과세를 강화해 고소득층에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겠다는 공약을 발표해 주식시장에 충격을 줬다.
이날 도쿄증시에서 닛케이225지수는 전날보다 2.12% 하락한 29,544.29로 거래를 마쳐 30,000선이 깨졌다. 오전부터 하락세였던 주가가 기시다의 당선이 유력해진 결선투표 시점부터 낙폭을 확대했다. 금융시장이 기시다의 등장을 반기지만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고노 류타로 BNP파리바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잠재성장률과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경제구조 전환이 차기 정부의 최대 과제”라고 지적했다.
내치와 외교·안보는 기존 답습
경제와 달리 내정과 외교 안보 등 분야 정책은 아베-스가 정부의 정책을 대부분 계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헌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전망이다. 전후 최장수 외무상을 지낸 기시다는 “긴급사태 조항 신설과 자위대 명기 등 자민당의 기존 개헌안이 자신의 임기 중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외교 안보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자민당 보수정권의 기존 노선을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과 기술 패권 등을 놓고 마찰하는 국가를 상대로 강경한 정책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기시다 총재는 중국을 염두에 두고 반도체 등 중요한 물자를 확보하고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경제안보 담당 장관을 신설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외교 갈등 사안인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지를 묻는 질문에 “적절한 방식을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